편지는 언제나 가장 솔직한 감정을 남긴다. 그 마음의 기록은 1930년대 경성이라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서사의 시작점이 된다.
검열과 침묵의 시대
문학 동인 ‘구인회’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천재 작가 김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정세훈, 그리고 세훈이 만들어낸 필명 ‘히카루’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편지로 시작된 존경은 오해를 거쳐 사랑의 형상을 띠고 실재하지 않는 존재 히카루는 점차 두 인물 사이에서 감정의 실체처럼 자리 잡는다. 작품은 거창한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에 쌓여가는 감정을 따라가며 동경이 사랑으로, 사랑이 집착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1930년대 경성은 말과 글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였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문학은 검열의 대상이었고, 문인들은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눌러 담아야 했다.
작품 속 편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듯 직접적인 고백 대신 우회적인 표현으로 감정을 전한다. 말 대신 글을 선택한 인물들의 태도는 억눌린 시대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내면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은 이처럼 억압된 시대의 공기를 배경으로 우리말·우리글조차 자유롭게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 검열과 침묵의 압력 아래에서도 글쓰기와 표현을 이어갔다는 문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침묵 속에 남겨진 감정들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시즌의 <팬레터>는 그 감정의 형상을 무대 위에서 찾는다.
히카루라는 존재는 ‘빛’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림자 연출을 통해 세훈의 내면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속성에 착안하여 세훈의 내면에서 분리된 또 다른 자아인 히카루를 그림자와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무대 위 한지 문에 드리우는 배우들의 잔상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대변한다.
특히 넘버 ‘거짓이 아니야’에서는 그림자에 머물던 히카루가 세훈과 대칭을 이루며 무대 전면으로 나서는데 이는 허구가 점차 실체를 획득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10년 동안 지켜 온 감정의 방식
<팬레터>의 매력은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사랑과 설렘, 질투와 집착 같은 감정들을 쌓아 올린다는 데 있다.
인물들은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쓰고, 숨기고, 오해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순수한 사랑뿐 아니라 그 감정이 지나칠 때 드러나는 불안과 흔들림까지 함께 보여준다.
공연이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반복해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이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방식에 있다. 김태형 연출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 했다”라고 말했듯 작품은 새로운 해석보다 관객이 사랑해온 정서를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편지라는 아날로그 방식의 매개를 통해 사랑과 설렘, 질투와 집착을 서서히 드러내는 작품은 빠르게 소비되는 감정 대신 오래 곱씹을 수 있는 여운을 남기며 매 시즌 같은 이야기를 다른 마음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그래서 팬레터는 매 시즌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동시에, 다시 극장을 찾게 만드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