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엘시노어 성의 성벽을 지키던 병사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 연극 <엘시노어>는 우리가 익히 기억해 온 왕자와 왕족의 서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성벽 밖에서 밤을 지새우던 두 보초병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작품은 그들의 시선을 따라 중심에서 밀려났던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끌어올리며 고전의 출발선을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
왕자의 복수로 기억되는 햄릿의 비극은 정말 그들만의 이야기였을까.
고전을 현재로 옮기는 방식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사건이 처음 시작되는 공간 엘시노어 성을 배경으로 한다. ‘엘시노어(Elsinore)’는 햄릿 왕자를 둘러싼 비극이 태동하는 장소이자 두 보초병이 매일 밤을 지새우는 일터이며 동시에 극 중 세계의 중심이다. 권력자들에게 이 성은 욕망과 음모가 교차하는 정치의 무대지만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 이들의 시선은 비극을 전혀 다른 결로 다시 써 내려간다.
<엘시노어>는 《햄릿》의 핵심 장면들을 두 병사의 ‘재연’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고전 텍스트 속 장면들은 때로는 리듬감 있는 신체적 표현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관찰과 풍자를 통해 변주된다. 장대한 독백과 철학적 사유로 대표되는 《햄릿》이 이 작품에서는 배우의 몸과 호흡, 빠른 전환 속에서 유연하게 재구성된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두 보초병은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선택의 주체로 호출된다. 선왕의 유령과 햄릿의 대화를 통해 비극의 진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는 그 사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갈림길 앞에 선다. <엘시노어>가 주목하는 것은 거대한 비극의 결과가 아니라 그 비극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이다. 살아남기 위해 진실을 외면해야 하는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말해야 하는가.
2인극으로 재구성된 햄릿의 인물들
이러한 긴장을 이끄는 버나르도 역에는 허영손, 김경록, 박주혁이 캐스팅되어 각기 다른 결의 정의감과 흔들림을 표현한다. 프란시스코 역은 강은빈, 김기택, 신은호가 맡아 생존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같은 인물을 서로 다른 해석으로 만나는 캐스팅 구조 역시 <엘시노어>가 고전을 현재의 질문으로 확장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무대에 오르는 두 배우는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햄릿, 선왕의 유령, 오필리아, 클로디어스 왕, 폴로니어스 재상, 레어티즈, 왕비 거트루드 등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오간다. 단 두 명의 배우가 수많은 인물을 넘나드는 2인 극의 형식은 관객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호출하며 이야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따라
특히 이 작품은 《햄릿》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햄릿》에서 보초병들은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니라 덴마크 왕국에 드리운 불안과 균열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존재들이다. 밤의 성벽, 선왕의 유령 출현은 개인의 비극 이전에 이미 국가 전체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셰익스피어 비극에서 ‘유령’은 단순한 초자연적 장치가 아니라 과거의 폭력과 미해결된 진실이 현재를 침식하는 상징으로 기능해 왔다.
이 지점을 알고 본다면 <엘시노어>에서 두 보초병이 느끼는 공포와 망설임은 구조적 폭력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자의 현실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극 곳곳에는 《햄릿》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이스터에그’처럼 숨겨져 있어 관객은 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장면 속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고전에 대한 친숙함이 많을수록 작품이 던지는 해석의 폭 역시 더욱 풍부하게 다가온다.
비극은 언제나 영웅의 선택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엘시노어>는 성벽 위에 서 있던 두 보초병의 목소리를 통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유지되는 세계와 그 침묵의 무게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고전을 알지 못해도 따라갈 수 있지만 알고 있다면 더욱 선명해지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어온 비극의 출발선을 재조명한다. 올겨울 성벽 위 두 병사가 들려주는 은밀한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릴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