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면, 가장 먼저 옷장을 정리하게 된다. 그간 동거동락한 옷들을 꺼내어 보다 보면, 그 계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여름의 얇은 티셔츠에는 강렬한 햇살의 흔적이 묻어 있고, 가을 코트의 주머니에서는 자주 가는 카페의 영수증이나 잃어버린줄 알았던 머리끈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옷가지 하나하나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은 결국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리를 마치고 빈 옷장에 새 계절의 질감을 채워 넣듯, 나는 계절마다 플레이리스트도 함께 정리한다. 지난 계절을 보내며 들었던 곡들을 잠시 내려두고, 새롭게 마주할 공기와 리듬에 맞는 노래들을 다시 고른다. 사실 어떤 곡들은 매해 같은 자리에 다시 놓이곤 한다. 그래도 마치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애착 니트처럼, 꺼내는 순간 그 계절의 냄새가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노래들이다.
그리고 겨울 냄새가 완연한 지금, 다시 듣게 되는 노래들을 소개한다. 차갑고 고요한 공기 속에서, 지나온 마음을 가만히 돌보고 겨울을 더더욱 잘 보내기 위한 리듬을 준비하게 하는 곡들이다.
Billie Eilish - 'Birds of a Feather'
빌리 아일리시 특유의 섬세한 호흡이 겨울의 공기와 절묘하게 겹친다. 감정을 크게 흔드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 천천히 온기가 번지는 느낌을 만든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겨울의 고요함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하게 밝지도,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은 톤이 겨울의 새하얀 질감과 잘 어울린다.
요네즈 켄시 (米津玄師) – 〈地球儀〉 (Spinning Globe)
조용히 회전하는 지구본을 한참 바라보는 느낌의 곡이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특별한 장면이 떠오르기보다는, 지나온 시간 전체를 멀리서 조망하는 듯한 감각이 먼저 찾아온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그 속에서 아주 작은 점으로 서 있는 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노래이기도 하다.
검정치마 (The Black Skirts) - 'Ling Ling'
겉으로 들으면 발랄하고 가볍게 흘러가는 멜로디지만, 안쪽에는 묘한 쓸쓸함이 배어 있다. 검정치마 특유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어서, 듣는 내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미세하게 일렁인다. 그래서인지 겨울과 특히 잘 어울리는 곡이다.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이 곡의 온도도 더 정확하게 느껴진다.
5 Seconds of Summer - 'Amnesia'
겨울이라는 계절은 종종, 일부러 꺼내지 않았던 기억이 슬며시 떠오르게 만든다. 이 노래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 거리를 너무 좁히지도, 너무 멀어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그때의 나도 나였고, 지금의 나도 여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잔잔한 멜로디와 함께, 마음을 정리하는 속도도 자연스럽게 천천히 맞춰지는 느낌이 있다.
페퍼톤스 (PEPPERTONES) - '계절의 끝에서'
제목처럼, 계절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노래다. 페퍼톤스 특유의 산뜻한 정서가 담겨 있지만, 마냥 밝기만 한 곡은 아니다. 지나온 계절을 돌아보는 약간의 아쉬움과 다음 계절로 건너가는 설렘이 동시에 섞여 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무언가를 끝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일이 꼭 거창한 변화의 순간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내일을 조금 더 가볍게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기분이다.
겨울은 유난히 고요와 정적이 크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모든 계절을 한 번에 겹쳐 떠올리게 만드는 시기다. 그래서 계절 따라 다시 듣게 되는 노래들은 단순한 취향의 고집이 아니라, 나를 다시 정돈시키는 작은 의식에 가깝다. 익숙한 멜로디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다음 계절을 향해 천천히 나아갈 마음의 여백을 만들어준다. 한 해를 어떻게 버텼든, 어떤 속도로 지나왔든, 이 노래들이 잠시라도 당신의 속도를 부드럽게 조절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노래들이 그 길의 겨울 한가운데에서, 조용한 배경으로 함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