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아픔을 보듬는 것. 피해 당사자의 곁에 있는 이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당사자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문제를 함부로 정의 내리거나 적절한 위로의 말을 택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일상에서도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를 스크린으로 옮겨와 세계 곳곳의 관객 앞에 선보이는 작업은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많은 이들의 아픔을 보듬는 것은 동시에 많은 이들 앞에서 그 아픔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기도 할 테니.
지난 10월, 개인의 트라우마를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연달아 개봉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과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국가도 다르고 다루는 세계도 전혀 다른 영화들이지만, 적어도 ‘개인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두 영화가 같은 방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듯하다.
두 작품 모두 책임감에 따르는 무게를 간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알고 그에 따른 파장이 가능한 좋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고심한 흔적이 묻어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와 얽힌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문제에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보여주지 않음의 미학
〈그저 사고였을 뿐〉과 〈세계의 주인〉은 모두 보여주지 않음의 미학이 담긴 영화다. 개인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작품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폭력의 재연일 것이다. 서툰 연출은 때로 명백한 폭력이 된다. 흔히 사용되는 플래시백이나 노골적인 묘사는 몇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스크린을 응시해야 하는 관객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두 영화 모두 그날의 사건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지향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또,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로 뻗어 나가고자 한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지금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려 나가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다시 말해 두 작품은 과거에 머물러 있기보다 과거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고 어떤 길로 나아갈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정부의 잔혹한 심문으로 트라우마를 안게 된 피해자들에 관한 영화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은 청각이다. 관객은 시각적 플래시백 대신 청각적 플래시백을 통해 그날의 사건을 더듬어간다. 그렇기에 관객이 의존할 수 있는 곳 또한 극 중 인물들의 대화로 극히 한정적이다. 정부로부터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어떤 모욕을 들어야만 했는지, 어느 정도의 공포가 그들을 잠식했는지.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날의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해자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 또한 소리에서 비롯된다.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기억하는 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의족 소리다. 주인공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는 극 중 “5년 동안 이 소리가 내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말한다. 그를 괴롭히던 의족 소리는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미스터리 사건의 시발점이자 엔딩까지 시종일관 팽팽하게 끌고 가는 힘을 만든다.
〈세계의 주인〉은 어린 시절 폭력을 겪은 고등학생 주인(서수빈)의 일상과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에는 주인과 같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저마다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피해의 정도나 상처의 깊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현재의 일상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마음으로 관계를 쌓고 스스로를 지탱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덕분에 관객은 범죄 피해자의 프레임을 걷고 우리의 곁에 있을지도 모를 한 사람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역설적으로 두 영화는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관객에게 최대한의 생각과 감정을 돌려준다. 개별적인 사건을 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끌어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시선
하지만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두 작품이 결정적으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 한 번의 폭력은 개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고 말한다면, 〈세계의 주인〉은 폭력으로 인한 삶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쪽에 가깝다.
〈그저 사고였을 뿐〉 속 피해자들은 5년 전의 비극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가해자에게 심문을 당했던 인물은 그를 “내 인생을 망친 놈”이라 노골적으로 지칭하는가 하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바히드가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거나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당장 죽여야 한다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해자를 마주하고 난 뒤에도 지난 5년간 바히드를 줄곧 괴롭혀왔던 의족 소리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는 폭력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개인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세계의 주인〉은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완전히 파괴한다' ‘피해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성명서의 문장에 주인이 동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그저 사고였을 뿐〉과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피해자들의 삶을 함부로 규정하거나 명명하려고 들지 않는다.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 한마디나 그들의 삶을 함부로 규정짓는 한 문장이 때로는 그들을 더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아직 망가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았음을. 피해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하기에 그 자체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기를 권하는 영화다.
오늘도 삶을 살아가고 있을 '바히드'와 '주인'에게
두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픔을 보듬고 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치부하는 이들에게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짙게 배여 있는 삶을 보여주는 방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본인의 ‘세계의 주인’이 되기를 택한 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 모두 어느 쪽도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이 되지 않도록 말을 정제하고 행위를 다듬으려고 한 노력이 나에게 닿았던 것처럼 같은 스크린 앞에 앉아 있었을 관객들에게도, 그리고 관객석 어딘가에 있었을 또 다른 ‘바히드’와 ‘주인’이에게도 온전히 닿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