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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두 달 전 책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를 읽으며 현대 미술의 온상지라고 불리우는 뉴욕에서, 심지어 갤러리에서 직접 일을 하면서 현대 예술을 오히려 비판하고 낱낱이 파헤치는 작가의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적 있다. 미술은 예로부터 부가적인 영역이었다고 하지만 현대에서의 미술이 하나의 상품과 자본의 용도로써 사용되는 계산적인 모습에 큰 실망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또한 프리즈 현장을 구경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난해하다고 느꼈지만 좋은 평가를 받고 인기가 많은 작품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며 '나의 미술적 시야가 이토록 좁구나' 라고 자책 아닌 자책을 했던 것도 두 달 전이다. 사실 그 이후로 미술에 대한 회의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거리를 두었었다. 본래 필자는 '미술'이라는 장르 아래의 작품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포용하는 편이었으나 일련의 사건들이 그 사고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휴식 시간이 생겼을 때 찾아보던 미술 작품도, 그 작품을 감상하며 혼자 공상하는 시간도 잠시 멈추었다. 그런 필자를 또 한 번 충격이자, '도대체 미술, 아니, 더 큰 범주의 예술이라는 게 뭔데?'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을 발견하였다. 오늘 소개할 책은 도서 <예술은 죽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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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목부터 굉장히 직설적이다. 예술이 죽었다. 두터운 양감의 물감 자국과 강렬한 붉은색, 검은색, 흰색. 어떻게 보면 벽에 물감칠을 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컨버스에 물감을 두껍게 바른 것 같기도 하다. 처음 느낀 건 바스키아의 작품 같은 느낌이 난다 였는데, 바스키아는 그래피티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기에 reincarnation, 즉 환생의 의미로서 이 책이 쓰여진걸까 하는 추측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 추측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표지가 많은 생각을 해주게끔 하는 것은 확실하다.

 

작가는 박원재. 그는 미술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면서 현대 미술계를 통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이끈 아트 갤러리는 2018년 아트 바젤에서 발루아즈 상을 수상한 유일한 아시아 갤러리인데 이게 무슨 말이냐, 최고의 아트 페어에서 매년 단 두 명만이 수상하는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토록 뛰어난 예술 평론가, 예술인이 왜 예술을 죽었다고 표현할까. 또 한 번 추측을 해보자면 현대 미술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술이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만큼 과거와는 달라진 현대 미술 사회 및 커뮤니티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필자의 추측은 과연 맞았을까?

 

책을 펼친다. 아하, 1부의 제목이 심상치 않다. 예술은 왜 멀어졌는가? 라는 질문이 던지는 무게가 묵직하다. 작가는 미술관에서의 정적인 미술 관람 구도에 대해 미술품이 아닌 기록물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17-19세기 산업혁명이 발생하며 부의 양극화는 더욱이 커졌고, 그로 인하여 예술은 과거, 삶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전유물, 자본에서의 상품으로 변조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미술은 우리 삶에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닌 오직 돈의 흐름을 발생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매 등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 것이 미술품이다. 그림 하나에 수십 억을 호가하는 작품들도 있으며 그것이 경매에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게 대다수이다. 그 미술품이 보여주는 게 무엇인지 보다는, 그 미술품을 그린 작가의 스토리가 훨씬 중요해졌다. 흔히 말하는 비판 중에 "일단 유명해져라,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를 칠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미술품이 다르지 않다. 이중섭도, 반 고흐도 살아 생전에는 빈곤으로 고통받는 삶을 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고 그것이 오히려 그림의 가격을 높여버리는 스토리가 되어버렸다. 그런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과연 그들의 작품이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삶을 그리고 생각을 그리는 미술이 왜 비싼 상품이 되어버린 걸까? 정말 근본적으로, 미술이 지향해야 바는 무엇을 나타내야 하는 것일까?

 

가뜩이나 AI의 발전으로 '인공지능이 이젠 창작의 영역까지 넘본다' 라는 우려가 나온지 오래다. 비슷하게 우려를 샀던 사건이 바로 카메라의 등장이다. 카메라가 등장하기 이전의 미술은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는 역할도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비율로 묘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실적이고 현실을 묘사하는 미술'로써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사실적이지 않은 묘사의 화풍들이고 아주 대표적인 예시로 큐비즘의 피카소 등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AI가 등장하며 위기감이 조성된 미술계에는 새롭고도 익숙한 질문이 등장하였다. 미술의 본질이 무엇인가?

 

작가는 상품으로서의 미술, 기계가 창조한 미술을 넘어 인간의 미술은 결국 공동체로의 결합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와 AI가 모두 따라할 수 없는 건 인간이 가지는 인간성이다. 그 善이라는 것, 이타적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 무엇도 따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미술은 그것을 수행하게끔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은 정적으로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아닌,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하기에 일상으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2010년 아브라모비치가 가만히 앉아있고 관객이 자유롭게 그녀의 건너편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끔 하였던 참여 예술은 아브라모비치와의 침묵 속 눈맞춤 속에서 그들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아브라모비치를 포함한 그들을 둘러싼 관객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가 지향하고자 하는 예술의 방향에 부합하다. 필자도 이 예술에 대한 영상을 본 적 있는데, 아브라모비치의 전 연인이 이 행위에 참여하면서 아브라모비치 또한 일련의 감정을 느끼는 듯 하였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브라모비치 또한 작품 속 하나의 요소가 된 것이 흥미로웠다. 이처럼, 공동체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곧 예술이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순간 예술의 생명은 돌아올 것이라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그래, 환생! 예술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결국 예술 또한 하나의 순환으로서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다. 즉 예술마저도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는 것이다.

 

박원재는 도서 <예술은 죽었다>를 통해 마냥 현대 예술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예술은 살아있었고, 과도한 자본주의의 영향과 개인주의 팽배,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예술이 본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이행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술은 우리 삶으로 들어올 수 있다. 예술을 꼭 '그림', '조각', '전시' 등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미적인 행위로 정의할 경우 예술은 동적으로 그것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가 미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곰곰히 성찰해보자. 나는 과연 예술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왔을까? 예술은 어떻게 즐기는 게 가장 '즐기는' 행위일까? 그 고민 속에는, 결국 석기 시대의 인류가 남겨놓은 동굴 벽화처럼 공동체의 삶과 함께 하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는 답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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