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우러러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의 시골길을 걸은 적이 있다. 외진 곳이라 건물의 불빛이 대부분 꺼져 있었고, 지나가는 행인 한 명 없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걷는 나에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사람은 마음이 순수하대.” 거기에 뭐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내가 그렇지’, ‘뭘 좀 아는구나’ 등 내가 했을 법한 말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때는 신의 멱살을 잡고 싶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거기선 내가 어떻게 사는지 참 잘 보이시겠죠. 대충 그런 의미다.
이건 내가 최근에 신을 떠올리며 바라본 하늘이다. 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짐을 싸러 자취방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5시까지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부족한 물건이 너무 많았다. 결국 혼이 쏙 빠진 채로 본관 병동 16층 출입문 앞에 당도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폐쇄병동의 입구에. 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2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해 챙겨 온 짐을 모두 뺏겼다.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좀 더 유심히 봤더라면 돌려받은 짐이 더 많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과 함께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보통 폐쇄병동 입원은 증상이 심해 일상생활이 어렵거나 자·타해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 결정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다만 나는 이 말이 개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나의 불행 역시 수많은 ‘제각각’ 가운데 몇 가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간단히 적어 보자면, 미래를 잃었다. 나는 현재 대학원 석사과정생인데, 박사 학위를 따서 교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포기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잃고 이곳에 흘러 들어온 케이스였다.
운명 같은 만남
홀로 진료와 입원 준비와 수속과 입실까지 모두 마친 뒤 처음 병원 침대에 누웠을 때 든 생각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였다.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전자기기 반입과 외부와의 연락이 금지된 이곳은 무인도나 다름없었고, 바깥에서의 모든 현실이 일시 정지된 상태에서 그런 고민은 무의미했다. 가히 무위(無爲)의 극치라 할 수 있는 폐쇄병동 생활의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무료를 극복할 것인가’였다. 나는 독서를 택했다. 다만 가져온 책이 전부 전공 서적이라 도무지 펼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락실에 있는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병실로 가져왔다.
제목을 보나, 책 소개를 보나 정신병동에 비치할 책으로 아주 제격이라는 인상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홀로코스트 체험을 담은 책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죽음의 수용소’는 당연하게도 저자가 복역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다하우 수용소를 뜻한다. 날카로운 도구, 쇠붙이, 줄이나 끈 등 자신과 타인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의 반입이 금지되는 폐쇄병동 역시 정반대의 의미에서 죽음의 수용소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토록 살고자 하지만 죽고, 누군가는 그토록 죽고자 하지만 산다. 그 아이러니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죽고자 하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도 잊고 흥미롭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호기심에 집어 든 책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마음이 아팠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담담한 어조로, 그러나 생생하게 서술되어 그 고통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특히 일생에 걸쳐 완성한 과학책 원고를 한순간에 빼앗긴 기분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때 프랭클은 다른 수감자에게서 물려받은 외투에서 <셰마 이스라엘> 기도문을 운명처럼 발견한다. 그는 그것을 ‘살아라’ 하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나 역시 꿈을 빼앗긴 대신 이 책을 만난 게 아닐까. 물론 그의 수감 생활에 비하면 나의 고통은 보잘것없고 그의 인내에 비하면 나의 정신력은 나약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크더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자유
이 책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용기를 전하면서도 그것이 흔해 빠진 충고나 이른바 훈수질로 전락하지 않게끔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너만 힘든 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수많은 불행이 존재하니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불행에게 영혼과 의식을 점령당한 당사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역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얼핏 이 책 역시 홀로코스트라는 최악의 비극을 말하면서 그보다는 덜한(정확히는 덜하다고 여겨지는) 불행의 당사자들에게 겸손의 자세를 가르치려는 의도로 읽힐지 모르지만, 큰 오해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빠져들다 보면 그런 마음이 저절로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게 핵심은 아니다. 프랭클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시련’의 하나로 간주하고 그러한 비극적 체험이 인생의 본질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저자의 홀로코스트 체험기인 전반부와 로고테라피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담은 후반부로 이루어진 이 책의 구성 역시 그것을 반증한다.
프랭클은 강제 수용소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변해가는지를 주목한다. 누군가는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누군가는 고고한 품위를 잃지 않고, 누군가는 끝내 삶을 포기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자유는 주어진 상황에 취할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태도를 결정할 자유’밖에는 없기에 그 선택의 가치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이 결정은 자기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프랭클은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미’라고 보았다. 그가 창안한 심리 치료법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어원인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불리는 로고테라피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것을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 로고테라피는 우리에게 특정한 삶의 목표와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여정의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로고테라피가 제시하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용기와 자유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만난 경험은 내겐 그 자체로 로고테라피 체험이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이 책이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까닭은 인간이 삶을 포기하고 병들어가는 원인에 대한 프랭클의 설명이 내 경험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는 실존적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서 비롯된 신경증을 가리킨다. 이는 언제 죽을지도, 언제 풀려날지도 불분명한 수용소 생활을 가리키는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혹은 완성을, 다른 하나는 이루어져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하는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한다.
그동안 나는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아왔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 고단하면서도 행복했다. 그래서 이런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다. 학문의 세계란 끝이 없기에 즐거운 거니까. 하지만 이제는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리게 생겼다. 언제 석사 과정을 마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대학원 생활은 나의 ‘미래’가 아닌 ‘일시적인 삶’이 되어버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내가 아픈 이유를 이토록 정확한 문장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프랭클은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본능적 충동의 이차적 합리화가 아닌 그 자체로 본질적인 동기라고 보았다. 로고테라피는 미래, 즉 환자가 장래에 성취해야 할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것을 환자가 스스로 찾도록 돕는다.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르며 일률적인 답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위한 특정한 사명이 있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책임’이라는 중요한 화두가 떠오른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만으로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그토록 살고 싶은, 나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책임으로써 삶에 응답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로부터 깨달았다. 5인실에 입원한 나는 세 명의 환자들과 첫날 밤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 날 두 명이 퇴원해 한동안 남은 한 명과 단둘이 방을 썼다. 그분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무셨기 때문에 적적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넷째 날, 앳된 얼굴의 환자 한 명이 우리 방으로 옮겨왔다.
계속되는 자해로 상당수의 소지품을 빼앗기고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주의 인물’이 된 환자였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양팔에 가득한 상처가 안타까워 신경이 쓰였다. 담당의와 면담하는 것을 엿듣기론(옆 침대라 그냥 들렸을 뿐이지만)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는다기에 틈틈이 말을 걸어주다 보니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연이 나의 어릴 적과 무척 비슷해 더욱 마음이 갔다.
아이에겐 ‘라떼는 말이야’ 류의 이야기처럼 들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공부에 대한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어렸을 땐 그렇게나 공부가 싫었는데, 대학에 와서야 좋아하는 것을 배우는 건 즐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지금의 공부가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다른 길도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그렇게 말한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아이보다도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같은 병실의 아이가 그려준 나의 모습
그렇구나. 나는 공부를 하지 못해서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만큼 공부가 하고 싶었던 거구나. 하지만 다른 길을 찾지 못했던 거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 자신을 만났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나 자신을. 그리고 내가 나에게 줘야 마땅할 ‘가장 좋은 것’은 프랭클에 의하면 ‘삶’과 그 ‘의미’인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누제닉 노이로제에 걸려있던 셈이다.
시련의 의미
학부 시절에 들었던 인상 깊은 수업 가운데 하나는 제목부터 남달랐다. <시는 어떻게 내게로 오는가>. 말 그대로 시에 대한 이런저런 것을 배우고 체험하는 수업인데,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에서 착안한 제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시인이 영감을 통해 시를 쓰듯이, 프랭클에 의하면 시련과 죽음 없이 인생은 완성될 수 없다.
로고테라피에 따르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기로 결정함으로써
프랭클은 그 어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조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시련은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승리로, 곤경을 성취로 뒤바꿀 때 인간의 잠재력은 최고조에 이르며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획득한다. 심각한 고난을 강인한 의지를 통해 이겨낸 사람을 보며 경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 같다. 여기서 이 글의 제목에 대한 하나의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시련이 나를 찾아올 때,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련은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입원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익숙한 얼굴이 우리 병실을 찾아왔다. 둘째 날에 퇴원한 환자 한 분이 재입원하신 것이다. 엿듣기론 자살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돌아오신 것 같았다. ECT(전기충격요법)까지 받으시는 걸 보면 증상이 꽤 심한 모양이었다. 퇴원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그분과 말을 제대로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작게라도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나도 그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으니까.
퇴원하는 날, 나는 세 명의 룸메이트들에게 한 통씩 짧은 편지를 썼다. 재입원하신 분께 쓰는 편지에는 내 빠른 퇴원의 비결이 이 책이라고 소개했다. 입원부터 퇴원까지 쭉 함께한 분께는 곧 퇴원하셔서 다행이라고 적었고, 입원 생활 동안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아이에게는 얼른 퇴원하라고 적었다. 다들 지금쯤 병원 밖의 삶을 마음껏 즐기고 있기를 바란다. 시련을 이겨내고 의미를 찾는 힘이 그들에게 깃들기를 빈다.
단 하나의 희망일지라도
그렇다면 병원 밖의 나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긍정할 수 없다. 꼭 내가 괜찮아야만 남을 걱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쨌거나 나도 그 병실에 입원한 환자고, 정신 질환은 단숨에 좋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상황은 결국 달라진 게 없다. 퇴원한 이튿날,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났다. 그 아픔이 유난히 크게 느껴져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우리 연구소가 주관하는 행사의 스태프로 일하다 또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손에 쥔 마이크를 바닥에 닿지 않게 하려다 더욱 크게 넘어졌는데, 행사장이 술렁이는 가운데 나만 태연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까짓 아픔은 얼마든 참을 수 있단 걸. 여기에 계속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 무릎뼈가 부수어져 가루가 될 때까지 넘어질 수 있단 걸. 프랭클은 자살을 기도한 환자에게 말한다. 사정이 좋아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좋아질 날을 보기 위해, 그날이 밝아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나는 이 책에서 단 한 문장만을 특별히 붉은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비록 사정이 좋아질 확률이 천 분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게 희망고문이라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인생에 없어선 안 되는 것이다. 삶에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내일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 삶의 의미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 나는 석사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박사 과정을 시작할 시기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이젠 다른 길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시련은 나를 찾아왔고, 시련이 내게 선물하려는 의미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어떤 삶이든 책임져야 하니까. 만약 인간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것이 신이라면 멱살을 잡고 욕하기보단 독촉하는 편이 낫겠다. 오늘 하늘이 아주 맑은 걸 보니 앞으로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