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은 꼭 한 해의 끝과 시작이 맞닿아 부재가 형체를 갖는 계절이다. 우리는 아직 겨울의 온도를 모른다. 그 겨울의 고요와 냉기 위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때론 일시적인 구원이다.
오쿠야마 히로시의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2019)는 그 부재의 계절을 담는다. 도쿄에서 눈 덮인 시골 마을로 전학 온 유라. 새 교실에서 맞닥뜨린 것은 친구도, 익숙한 놀이도 아닌 ‘찬송가’와 ‘기도’였다. 유라는 그곳에서 처음 기도를 하며 제 안의 작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낯선 환경에서 유라는 자신의 결핍을 위해 소원을 빈다. 친구를 만들게 해주세요, 돈을 주세요. 기적처럼 이루어진 작은 소원은 신의 응답이라기보다, 믿음이 지속되기 위한 조건처럼 보였다. 카즈마와 함께 축구했던 눈 덮인 운동장, 유성우를 보았던 밤과 겨울 방학 중에 갔던 카즈마의 별장. 그 순간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카즈마가 사고를 당하고, 기도는 더 이상 답을 주지 않았다. 예수님은 더 이상 유라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했다.
수시로 손을 모으던 유라는 더 이상 작고 분리된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신으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오히려 유라는 그 존재를, 그 믿음을, 자신의 손안에 끌어내린다. 그는 신을 눌러버린다. 유라는 카즈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영화는 그 침묵을 고요하게 비춘다. 유라는 흰 국화 대신 카즈마가 행운의 색이라고 말했던 파란색 꽃을 꽂아둔다. 오쿠야마의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보다 공기와 숨결을 오래 비춘다. 겨울의 흰 빛, 정지된 프레임, 아이의 미세한 호흡만으로 세계를 채운다.
유라는 너무 어리다. 죽음을 이해하기엔 세상이 아직 너무 단단하고 하얗다. 그렇기에 유라의 기도는 사실상 신을 향한 언어가 아닌, 슬픔이 언어를 잃었을 때의 몸짓이다. 그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신에게 되묻는 대신 손을 모은다. “왜”라는 말 대신, “부디”라는 말로 바꿔 부르는 아이.
그 침묵의 기도 속에서, 관객은 어린 존재의 미숙함보다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무력함을 본다.
죽음에 대해 무지할수록, 슬픔보다는 지난 기억 속의 미숙함에 분노한다. 유라는 ‘슬퍼하는 법’을 배우며 자란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타인을 추모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잃을 때, 눈물이 먼저 흐를까. 부정하고, 이름을 불러보고, 메시지를 보내보고 나서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부재를 배우지 못한 채 기도로 누군가를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고 하지만, 유라의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녹지 않은 눈밭에서, 유라는 카즈마와 같이 축구할 날을 다시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 이야기는 오쿠야마 히로시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는 상실의 계절을 새하얀 눈으로 덮어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흰색은 기억의 온도이자 상실의 질감이다. 눈은 슬픔을 덮지만, 결코 지우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겨울에서 시작해 겨울로 끝난다.
누군가의 부재를 끝없이 기억하고, 그 부재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 그것이 슬픔을 견디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