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은 대체로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을 입고, 먹고, 사용하며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 과정은 어떤지는 알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소비하기에 익숙해진다. 소비의 입장에서 좋은 것, 가치 있는 것만을 가려내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생산의 과정에 배제되는 것은 우리를 더욱 외롭고 공허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생산과 창조의 주체가 희미해진 시대에서 창작을 한다는 건 유희의 목적보다도 그 존재와 과정을 사유하는 일로써 인간을 자극한다. 원초적인 본능과 감각을 굳이 깨워내는 일에는 분명 가치가 있다.
특히 글쓰기는 ‘나’를 타인으로 설정하고, 스스로를 거리 두어 바라보는 행위이다. 글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읽어보는 일에서 객관성을 잃어도 보고, 찾아도 보는 일은 꽤 단순하면서도 나를 인식하는 과정 중 하나다. 이런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는 자전적 글쓰기의 규범을 뒤흔든 전복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나(1인칭)’로 서술하기를 거부하고, ‘R.B.’ 혹은 ‘그’라는 제3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문체적 선택이 아니라, ‘자아’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는 철학적 실험에 가깝다. 책을 처음 펼치면 "이것은 다 소설적 인물이 말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라는 문장이 그 뜻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200개가 넘는 주제에 대한 각기 다른 분량으로 구성된 책은 화자를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어느 정도의 오차와 몰이해를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이 부분에서 독자로써 현실적인 공감과 웃음이 나왔다. 가장 깊은 확신은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그 하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확한 자아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보다 이 편에서 신선한 즐거움을 느꼈다.
나는 내 언어를 보는데, 보여진 대로다. 완전히 벗은 그대로의 내 언어를 본다. 이것은 상상계의 부끄럽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이어 세 번째 시각적 환영이 그려진다. 결코 닫히지 않는 괄호 안에 무한히 배열된 언어들의 시각적 환영, 유토피아적 환영은 살살 움직이는, 복수적인 독자 한 사람을 전제한다. 이 독자는 재빨리 따옴표를 치고 뺀다. 그 독자가 나와 함께 글을 쓰기 시작한다. - 나는 언어를 본다.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해체하며, 자아란 임시적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사회는 그 변화의 연속을 하나의 동일한 ‘나’로 묶어내기를 요구한다. 어떠한 계기로 인해 A에서 B로, 또 C에서 D로, 인간을 단방향으로 진화하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바르트는 바로 이 환상을 해체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짧은 단상, 인용, 사진, 어휘의 조각을 나열한다. 계속해서 '나'에게 멀어지려는 파편들은 서사를 형성하지 않고 모호하게 느껴지지만, 그 단절 속에서 오히려 ‘나’의 본질이 드러난다. 자아란 일관된 서사가 아니라, 무수한 순간들의 잔향이 만들어내는 임시적 구조라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바르트의 철학을 시각으로, 활자로 구현한다고 보인다.
전통적인 자서전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라는 서사적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방향적 성장 서사를 보이며 현재의 나 혹은 미래의 나를 가장 고점의 순간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삶은 없다. 뻔하고 단순한, 그렇기에 보편적인 서술 방식을 바르트는 자신을 부르는 방식으로부터 다르게 접근한다. 그에게 ‘롤랑 바르트’라는 이름은 '나'가 아니라, 하나의 기호이다. 서술자는 분리되고, ‘나’는 텍스트 속에서 타자가 된다. 그 결과, 독자는 바르트를 이해한다기보다 읽고 보게 된다. 그가 시각적으로 풀어낸 산발적인 이야기를 하나씩 밟아나간다. 마치 기호의 배치처럼. 멋대로 배치된 물건들처럼 흩어진 문장과 글들을 독자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바르트의 글은 난해하다. 하지만 그 난해함은 그가 언어로 무언가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믿는 것에서 온다고 느껴진다. 단 한 마디, 단 한 문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각자의 세계를 어떻게 정돈되고 아름다운 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에게 언어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내는 게 아니라 그 단서를 얻는 체계라고 이해된다. 우리가 고정된 나 혹은 자아를 믿는 순간조차, 우리는 언어의 규칙과 사회적 코드 속에서 어느정도 타자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바로 그 지점들에서 바르트가 보이는 낯선 문장, 파편적 단상 속에서 언어는 조금 더 새롭게 보인다.
분명 이젠 이런 환상을 가진 십 대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작가이고 싶어! 어떤 동시대 작가를 모사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니까 작품이 아니라, 그 실천을, 자세를, 가령 호주머니에는 수첩을 넣고, 머릿속에는 문장을 넣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삶을 말이다. (중략) 1939년 어느 날 루테티아라는 주점 저 안쪽에서 배 하나를 먹으며 책 한 권을 읽고 있는 그를 나는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왜냐하면 환상은 작가에게 품는 건데, 마치 내밀한 일기장 속의 작가를 보는 것 같아서다. 작품이라기보다는 작가에 대한 환상인 것이다. 신성함의 최고 형태. 흔적과 그 공허. - 환상으로서의 작가
모두가 매순간 생각나는 단상들을 끊임없이 입으로 말한다면, 타인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게 될까. 아마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 롤랑 바르트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종종 작가의 글에서 ‘진짜 그’를 찾고자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도 생각하고, 그의 모든 생각이 글에 투영된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가 그렇게 단적으로 이해된다고 하면 우리는 대화를 할 필요도, 욕망도 없어질지 모른다. 역시 작가도 그들의 스쳐가는 생각과 가끔 잡히는 작은 주제들을 좇으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작가의 세계와 이야기를 전부 알고 싶다는 욕망에서 타인의 세계를 절대 다 알 수 없다는 끝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꾸준하게 그 순간의 R.B를 담아낸다. 자서전은 ‘어느 정도 정제된 자아의 완성 과정’을 드러내려는 장르로 느껴지지만, 바르트에게 그것은 환상이다. 자아는 이미 타인의 언어, 사회적 담론, 기억의 왜곡 속에 구성된 허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의 자전적 글쓰기는 자신을 일관된 방식으로 그려내는 대신, 자서전이라는 형식의 한계를 폭로한다.
이 책이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자아라는 미지의 영역을 가장 정직하고도 실험적으로 응시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쓰기는 독자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과연 나를 알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질문을 넘어, 우리가 언어가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는 그의 물음으로 시작될, 독자들이 자신만의 ‘R.B.’를 쓰게 만드는 지적 유희의 발상지이다. "텍스트는 이미지 없이 이어질 것이다. 글을 쓰는 손의 이미지 정도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