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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런던, 사람들에게 눈총받는 여인이 있다. 이름은 ‘안나’. 뮤지컬의 첫 넘버는 ‘난 뭐지’로, 앙상블과 함께 시작된다. 앙상블의 노래가 이어지다 어느 순간 안나가 등장해 “난 뭐지?”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여성의 인권이 매우 낮았던 빅토리아 시대,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 의문을 품던 안나는 제 뜻을 굽히지 않고 행동하는데 극의 초반부터 캐릭터의 성격이 확실히 드러나 처음 보는 ‘안나’라는 인물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안나에겐 독특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습관이다. 그것은 안나의 상상 속에서 올빼미로 형상화되고 안나는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이런 안나의 모습이 우리에겐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안나는 조신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또라이처럼 여겨진다. 안나는 사실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만 큰 죄를 저지른 사람보다 더한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아무도 이에 대해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

이때 안나를 찾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브라운’.
할머니를 모시던 시녀 ‘안나’를 찾으려 안나의 발자취를 따라온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힌 안나를 마주한다.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만 직접적으로 제 생각을 표현하는데 거리낌 없는 여인이었던 안나는 브라운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당돌하고 재치 있고 할 말은 꼭 하는 모습이 지금껏 생각해 오던 여인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천천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흘러간다.
브라운의 의도치 않은 응원으로 여성들만 가입할 수 있는 여성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을 알게 된 안나는 자신의 능력을 십시일반 활용해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 안나의 능력은 이야기를 ‘말’하는 능력에 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내는 능력이다.
뮤지컬을 보며 안나가 가진 그녀의 말하기 능력은 사실 그 시대에 모든 여성이 바라왔던 능력이라고 느껴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과 꿈을 택하기 대신 사회적으로 정해진 여성의 역할을 따라야 했고 그러지 않은 여성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자신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남성과 다르게 여성은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더라도 무조건 숨기고 들켜선 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것에 간절했을 것이고 누군가 꾹꾹 숨겨오던 자신의 욕망을 대신 건드렸을 때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강했을 것이라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의 능력과 그 능력에 걸맞은 안나의 진취적 행동은 당대 여성들에게도, 지금 이 뮤지컬을 보는 여성들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안나가 <로렐라이 언덕>에 들어간 것은 그녀의 미래를 바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생일대의 선택이었다. 브라운은 안나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안나의 꿈과 행동을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남성으로, 신사의 모습으로 자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렐라이 언덕>의 회원들은 안나가 겪은 차별이 뭔지 알기 때문에, 또 그들도 그러한 차별을 익숙히 받아왔기 때문에 안나의 꿈을 지지하고 그녀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바로 <레드북>이다. 뮤지컬을 보기 전, 왜 책 제목이 <레드북>일까 생각했었는데 뮤지컬을 보면서 모든 게 다 이해됐다.
내가 만약 저 시대에 있었다면 안나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런 용기가 났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졌던 뮤지컬이었다. 뮤지컬 2막에서 안나의 넘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들으며 그녀가 선택한 모든 행동과 그녀가 결정한 그녀의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뮤지컬 <레드북>은 2025년 12월 7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계속된다.
많은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픈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