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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지구를 위해 자신을 걸고 싸우는 10대의 주인공들. 주인공들은 자기 앞에 처한 가혹한 운명을 어쩐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싸운다. 수많은 만화에서 반복되어온 이 설정은 이제 하나의 전형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이 거대한 서사의 무게를 외부로 확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전쟁과 재난을 단 두 사람, 혹은 한 개인의 내면으로 끌어당긴다. 세계의 붕괴는 배경이 아니라, 마음의 균열로 번역된다. 그렇게 태어난 장르가 있다.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이름, 바로 ‘세카이계(セカイ系)’이다.

 

‘세카이계’라는 단어는 공식적인 장르 구분은 아니다. 이 단어는 20세기 말 어떤 공통된 성향을 띈 만화 및 애니메이션, 소설, 라이트노벨,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등 일본의 서브컬쳐 작품들과 그런 문화에 반응한 소비자들의 담론 과정을 엮어 ‘세카이계’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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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방영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은 누구나 제목 정도는 들어보았을 법하다. 에반게리온의 엄청난 인기와 파급력에 영향을 받은 세기말 작품들은 에반게리온과 비슷한 성향을 띄게 되었다. 이 ‘에반게리온적 성향’이라 함은 곧 세카이계 작품들의 성향인데, 서술해보자면 이렇다.

 

1) 인물의 혼잣말(독백)이 많이 등장한다.

 

2) 그 혼잣말에는 ‘세계’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되며, 등장인물의 내면과 자의식이 외부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는 작품은 ‘세카이계 작품’이라고 불리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2번이다. 등장인물의 내면이 외부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말인즉, 인물의 사소한 심경 변화나 개인적인 고민 같은 것이 ‘세계의 운명’, ‘지구의 멸망’ 같은 중대한 사안들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일본어로 ‘세카이’는 ‘세계世界’를 뜻한다(별개로, ‘세카이계’를 쓸 때는 한자가 아니라 가타카나 セカイ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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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시대적 배경은 2015년으로, 에반게리온의 방영 시기를 고려하면 이 작품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는 재앙 이후 지구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 어느 날 15세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갑자기 ‘에반게리온’이라는 거대 로봇을 타고 ‘사도’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신지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인간관계와 자아 정체성 고민 등에 휩싸여 괴로워하는데 그런 신지의 심경과 그에 따른 선택들이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

 

TV 판 애니메이션의 초반부는 건담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특성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세계관의 설명이나, 에반게리온과 사도의 전투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러면서 후반부에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이카리 신지의 내면세계, 즉 감독 안노 히데아키의 내면세계이다. 작중 내내 신지는 괴로워하면서 혼잣말을 엄청나게 중얼거리고, 이렇게 자아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낸 것이 에반게리온의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는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가 신지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내면을 풀어낸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개에서 사회의 다른 일원이나 세계정세 같은 것은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5명 내외의 중심인물을 위주로 모든 운명이 갈라지고 지구의 미래가 바뀐다.

 

‘세카이계’는 에반게리온의 이러한 특성들을 물려받았고, 그래서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쉽게 휘둘리고 불안해하는 청소년기의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또한 ‘세계멸망’, ‘인류의 존속’ 같은 거창한 문제들과 주인공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므로, 평행우주나 전투 로봇, 타임슬립 등을 다루는 SF 장르가 많다.

 

이러한 작품들은 에반게리온의 성공 이후 20세기 말~21세기 초 많이 등장했기에 ‘에반게리온 같은,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라고 해서 ‘포스트 에반게리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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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 

 

 

‘꿈도 희망도 없는 마법소녀물’, ‘치유물: 치명적 유해물’이라는 장난 섞인 별명을 달고 있는 마법 소녀 애니메이션인 〈마법 소녀 마도카☆마기카〉는 대표적인 세카이계 작품이다. ‘마법 소녀’라고 불리는 여학생들이 ‘마녀’라는 적과 싸우는 내용이 주요 내용이다. 마법 소녀들의 개인적 고민과 좌절들, 감정들이 일으키는 영향들이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마법소녀들의 몸과 마음은 상처 입는다. 결국 TV판 애니메이션의 결말에는 주인공 마도카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자기희생을 통해 온 세상의 모든 마법소녀들과 세계를 구원한다. 꿈도 희망도 없다고 알려진 것에 비해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메세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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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그녀

 

 

세카이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종병기 그녀〉는 일본 홋카이도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 슈지와 그의 여자친구인 치세의 귀여운 러브 스토리로 시작한다. 슈지와 치세는 아직 연애에 서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르지만, 서로 부딪히고 또 이해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키워나가고 있다. 평화롭던 어느 날, 도시에 알 수 없는 폭격이 가해지고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슈지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의 전투기와 싸우는 작고 빠른 비행 물체를 목격하게 된다. 이 비행 물체는 곧 격추되어 땅에 떨어지고, 슈지는 건물의 잔해 속에서 쇠로 만들어진 날개와 무기를 온몸에 달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그는 바로 본인의 여자친구인 치세. 치세는 자신이 일본군의 최종병기가 되었다며, 앞으로 외국군과 계속해서 전투를 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음을 밝힌다. 슈지는 그런 치세 또한 사랑하고 받아들이지만, 점차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힘에 휘둘리며 폭주하는 치세와 점점 잔혹해져가는 전쟁 속에서 치세와의 사랑은 위태로워져 간다. 이에 따라 세계의 운명도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접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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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한편 ‘하루히즘haruhi-ism’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 비해 쾌활하고 밝은 하이틴 애니메이션이지만, 의외로 충실하게 세카이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주인공인 평범한 남학생 쿈은 새로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하루히는 예쁜 외모의 미소녀지만 항상 뚱한 표정과 거친 말투로 일관한다. 그런 하루히는 외계인, 미래인, 초능력자를 만날 날을 꿈꾸며 평범한 현실 세계에 따분함을 느낀다. 그런데 특별한 점은 하루히가 따분함을 느끼고 세계의 변화를 원한다면 그 세계는 실제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하루히가 외계인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자 외계인과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고, 하루히가 여름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인공 무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여름방학 속에 갇힌다, 하루히가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정말로 지구가 멸망할 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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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카이계 작품들은 전쟁과 재난 같은 무겁고 중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작품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중심축은 결국 관계의 대한 이야기이다. 거대한 세계의 붕괴나 인류의 멸망은 단지 배경에 머무르고, 인물들의 감정과 선택, 그리고 서로를 향한 연결이 서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세카이계의 ‘세계’란 실제의 지구나 사회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좁고도 밀도 높은 우주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장르의 종말은 곧 ‘세상의 끝’이자 ‘관계의 끝’을 의미하며, 그 속에서 인물들은 사랑과 고립, 구원과 단절의 경계에 선다. 결국 세카이계는 ‘세계’라는 거대한 말 속에 숨은, 가장 개인적인 감정의 서사를 드러내는 장르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는 매일같이 전쟁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타인과의 갈등이든, 스스로와의 싸움이든, 그 전장은 언제나 마음 안에 있다. 세카이계가 말하는 ‘세계의 멸망’은 결국 우리 내면의 균열과 회복에 대한 은유다. 거대한 재난의 풍경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두 사람의 마음이다. 세카이계의 종말은 언제나 새로운 이해의 시작이다. 우리도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타인을 향한 새로운 이해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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