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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현대미술. 그 이름만으로 낯선 감각이 엄습한다. 사회적으로 아름답다 부르던 것은 진작에 무너지고, 작가의 의도조차 명확히 알 수 없는 추상적 형상들이 캔버스 위를 유영하는 세계. 보통 사람들은 이런 현대미술을 두고 ‘난해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평을 내리지만, 이는 결국 ‘모르겠다, 알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과 다름 없을 것다. 그러나 나는 현대미술이야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예술이 아니라, '보는 만큼 알게 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무리 상징적이고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한들, 결국 이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의 변주다. 그렇기에 그 차별성은 메시지 자체가 아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을 것이다.

 

그래, 다 좋다. 그렇다면 왜 현대미술은 그토록 대중에게 불친절한가? 이 질문에 온몸으로 뛰어든 한 저널리스트가 있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코르크 도크에서 미국 최고급 와인 산업의 민낯을 파헤쳤던 저자 비앙카 보스커는, 이번에는 그 철옹성 같은 현대미술계에 '스파이'처럼 잠입한다. 어느 날 잊고 지냈던 할머니의 수채화 한 장을 계기로,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여정은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를 통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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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캔버스를 펼치고, 갤러리 벽을 몇 번이고 페인트칠하며, 마이애미의 뜨거운 아트 페어에서 그림 한 점을 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억만장자 컬렉터들로 가득한 파티에 끼어들고, 기이한 퍼포먼스 아트 현장에서 벌거벗은 예술가와 마주하는 경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예술의 성지라 불리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고요한 진공 속에서 작품을 오롯이 응시하는 시간을 보낸다. 업계 엘리트와 내부자들의 냉소와 멸시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녀의 치열한 여정은, 한 권의 생생한 탐험 일지이자 현대 예술에 눈을 뜨기 위한 좌충우돌 회고록이며, 나아가 자신만의 미학을 찾아가는 자기 성찰적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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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책은 예술에 대한 오래된 정의나 미학 이론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미술계가 돈과 권력, 계급과 욕망, 허세와 가십이 뒤엉킨 거대한 '판'임을 투명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이 폭로가 책을 냉소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립된 리그 안에서도 치열하게 창작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눈앞에 두고 울음을 터뜨리는 관객들의 모습을 통해 예술의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저자는 예술계의 기계적인 작동 방식 너머, 더 확장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그림 한 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그녀가 액자를 옮기고, 조명을 달고, 캔버스를 밑칠하며 예술가들과 몇 시간씩 함께하던 동안, 비로소 작품을 바라보는 '진짜 감각'을 깨우치기 시작한다.

 

 

고흐는 그 유명한 해바라기(Sunflowers)를 그릴 때 당대의 최신 안료였던 크롬산 납으로 만든 노란색 물감을 썼는데, 이 안료가 쉽게 변색된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밝혀졌다. 그래서 처음엔 밝은 노란색이었던 꽃잎이 진짜 꽃처럼 갈색으로 변했다. 1960년대에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형광색 줄무늬가 인상적인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그렸다. 그가 사용한 밝은 주황색, 출입 금지 구역을 표시하는 테이프 같은 노란색은 벌써 색이 바래고 있다. 한 보존사에 따르면 이 작품은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우윳빛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멋진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의 눈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변화한다. 상하고, 썩고, 내려앉는다. 어떻게 보면 벽에 붙어 있는 글은 그런 변화를 그때그때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설명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조명 속에서, 바로 이날, 바로 이 시각, 바로 이 투어에서 작품을 만나는 것임을 이제 여러분도 알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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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예술은 오로지 당신이 '보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이는 예술이 소수의 전문가나 선택받은 천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감각의 주체로서 예술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저자의 신념에서 비롯된 메시지다. 이 책은 현대 예술을 어렵게만 느껴왔던 이들에게는 가장 유쾌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이미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시각의 렌즈를 선물해 주는 책이 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처음에는 미술계의 비밀을 폭로하는가 싶지만, 마지막에는 그 해답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역설한다. 제대로 된 직함 하나 없는 갤러리 인턴에서, 신예 예술가의 어시스턴트,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비원까지. 뉴욕 한복판, 현실 예술계를 엿보고 싶은 모든 스파이들에게 비밀스러운 기록이 되어줄 책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책은 50여 년 전 한국의 1세대 미술평론가 유준상의 말과 겹쳐진다.

 

 

“흔히들 『나는 대학(大學)을 나오고 지식인(知識人)으로 자처하는데 전람회에 가보면 도무지 요즘 그림들은 알수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의 『모르겠다』는 것은 이미 마음속에 그가 가진 기정적(既定的)인 틀(그림은 이런것이라는 지식(知識))에 그 그림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논리적(오성적(悟性的))인 일종의 선입견(先入見)이다.

 

미술작품은 그런 오성(悟性)보다도 감성으로 감수해야한다. 현대회화(現代絵畵)를 보는데 가장 긴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허심탄회(虚心坦懷)한 마음으로 작품을 대해야한다는 것이다. 허심탄회(虚心坦懷)한 마음 속에 그림을 오성(悟性)이 아닌 감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작품을 보는 감성은 점점 세련되어간다.“

 

현대회화(現代繪畫)를 어떻게 볼것인가, 『조선일보』, 1968.06.02.

 

 

지식과 선입견의 ‘오성(悟性)’을 내려놓고 ‘감성(感性)’으로 허심탄회하게 작품을 대하는 것. 이는 50년의 시간을 넘어, 뉴욕 미술계에 뛰어든 한 스파이가 온몸으로 깨달은 진정한 예술 감상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고, 진정한 나를 재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색채를, 사물을, 작품을, 예술을, 그리고 삶을 ‘보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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