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빠져 있는 먼 과거의 일을 가슴으로 느껴볼 기회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역사를 공부하며 관련 지식을 충실히 쌓는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닐 테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시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누군가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마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관람한 연극 〈퉁소소리〉는 일개 관객일 뿐인 내가 마치 최척과 옥영, 그리고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존재했던 그 시간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감각을 일으키는 공연이었다.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이 지은 17세기 한문 소설 『최척전』을 각색해 만든 이 연극은 고선웅 연출가가 무려 15년간 숙고해 극화한 만큼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 이호재 배우가 노인이 된 최척으로 등장해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말로 풀어내듯이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도 효과적이고, 배우들의 연기와 장면 전환도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하면서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대서사시를 140분이라는 시간 안에 촘촘히 채워 넣었다.
전쟁의 체험은 연극의 원작인 『최척전』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비롯한 각종 전란과 명나라가 힘을 잃고 청나라가 득세하는 명청교체기가 동시에 일어나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작품 속 인물들은 상실과 이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들은 새로운 이국땅을 밟으며 비일상적이고 이질적인 체험을 지속하기도 한다.
〈퉁소소리〉는 이와 같은 전쟁 체험의 다면적인 모습을 풍부하게 담아낸다. 일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잃은 조선인들이 온 나라에 독처럼 퍼진 무력감에 빠져 마치 시체와 같이 해롱거리는 장면은 일본군이 서로 내기를 하듯이 즐겁게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가는 장면과 이어지면서 전쟁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는 한옥의 마룻바닥 형상을 띤 드넓은 무대 위에서 최척과 옥영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과 중국, 베트남이라는 서로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활기 넘치게 펼쳐낸다.

최척과 옥영 가족이 겪어야 했던 생이별과 갖은 수난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유의지로 살아간다는 명제에 반기를 들고 싶어진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시대상을 제거하면 『최척전』도, 〈퉁소소리〉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전쟁이 없었다면 최척과 옥영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남원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사다난한 그들의 인생을 마주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살면서 내리는 모든 선택이 과연 시대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작품은 세계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무너져 내리는 소극적인 인간상을 그리고 있지 않다. 삶을 포기하지 않은 끝에 결국 모두가 재회하게 되는 감동적인 결말을 통해 연극은 되려 끊임없이 무릎을 꿇리는 굴욕스럽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또다시 일어나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우리 선조들의 강인함을 담았다. 삶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살아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시대 불변의 법칙을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이야기는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세상 곳곳에 뿌릴 수 있다. 〈퉁소소리〉도 마찬가지다. 한낱 빛바랜 옛날이야기로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릴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수면 위로 꺼내 오늘날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 연극의 진심 어린 열정을 응원한다.
2024년 초연으로 극찬을 받은 뒤 한층 더 진화된 모습으로 돌아온 〈퉁소소리〉를 통해 꼭 깊고 진한 감동을 느껴보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