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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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 르마스크_메인 포스터.jpg

 
 
그런데 그때 브루어 씨의 예상 중 많은 것을 내동댕이치고 그의 가장 유능한 젊은이들을 앗아간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 전쟁의 마수는 너무나 깊이 음흉하게 파고들어, 케레스의 석고상을 박살내 버리고 제라늄 꽃밭이 구멍을 냈으며, 머스웰 힐에 있던 브루어 씨 댁 요리사의 신경을 파탄내 버렸다. (…)
 
전쟁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굉장한 일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우정과 유럽 전쟁과 죽음을 겪었고, 승진했으며,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었고, 앞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었다. 그는 거기 살아있었다. 마지막 포탄들도 그를 피해 갔다. 그는 그것들이 폭발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평화가 왔을 때 그는 밀라노에서 한 여관집에 숙박을 배정받았다. 안뜰이 있고, 꽃 화분이 있고, 작은 식탁들을 내놓은, 딸들이 모자를 만드는 집이었다. 그리고 두 딸 중 동생인 루크레치아와 그는 약혼했다-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당혹함이 엄습하던 어느 날 저녁.
 
이제 다 지난 일이었고 휴전은 조인되었고 전사자들은 매장되었는데도, 그는 특히 저녁이면 느닷없는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열린책들(2009), p. 115~116
 
 
 
뮤지컬 <르 마스크>

    

전쟁이 한창이던 1918년(그때 사람들은 후에 이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을 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인 조각가 ‘마담 래드’는 프랑스 파리에서 ‘초상가면 스튜디오’를 설립해 전쟁 중 얼굴이 훼손된 군인들의 부상 전 사진을 참고해 실제 얼굴과 비슷한 가면으로 만들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뮤지컬 <르 마스크>는 거기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레오니’,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그녀가 얼굴에 부상을 입고 찾아온 군인, ‘프레드릭’의 가면을 만드는 일을 맡게 되면서 두 사람이 가진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다.

 

 

르마스크_공연 사진_레오니 역 이지수, 페르낭 역 박근식, 마담 래드 역 김지민_제공 이모셔널씨어터.jpg

 
 
찾아온 기회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진심으로 그가 회복되길 바라게 되며 불붙은 레오니의 열정과, 레오니로 인해 점차 세상에 마음을 열어가다, 예산 부족으로 스튜디오를 닫게 된다는 소식에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절망하는 레오니를 위로해 주고 송별 자리에서 모금을 하자고 제안하며 연설도 하겠다 나서는 프레드릭의 섬세함, 레오니가 가면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프레드릭이 원치 않았던 일-그의 연인인 르네에게 전쟁 전 프레드릭의 사진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던 일-을 하고 말았던 게 들키고,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르네가 프레드릭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 프레드릭이 느꼈던 밑바닥 같은 절망감, 그래서 프레드릭이 죽으려고 할 때 온몸을 던져 막아서며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한 자신의 최선에 거듭 사과하며, 진심 어린 말투로 살아갈 것을 호소하는 레오니의 진심,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말로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프레드릭이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움켜쥐었던 만년필을 다시 쥐어주며 “그건 이렇게 쥐는 거예요.”라고 레오니가 말할 때의 내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듯했던 슬픔의 정화, 만년필이라는 상징을 통해 끊어버리지 않고 이어가는 삶을 응시하며 마무리되는 커튼콜.
 
 

르마스크_공연 사진_레오니 역 이지수, 프레데릭 역 임정모_제공 이모셔널씨어터.jpg

 
 
슬픔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삶의 뭍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에 뮤지컬은 진심과 최선, 그리고 기원(冀願)이라고 답한다. 뮤지컬은 그 진심과 기원을,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안고 살았던 레오니와, 귀족 출신이지만 전쟁에 참여하고 얼굴에 부상을 입고 삶의 의지를 잃은 프레드릭을 마치 서로 거울처럼 비춰가며, 상대방의 그늘 너머에 있는 치유의 빛을 탐색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꿋꿋한 연대가,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던 그들의 최선에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죽으려고 하는 프레드릭을 향해, 실은 살고 싶었던 거라는 레오니의 대사가 자꾸 맴돌았다. 그런데 나는 공연장을 나서면서부터 이 뮤지컬 무대의 바깥을 상상하게 되었다. 시간도 좀 더 흐르고 장소도 다른, 1923년 6월의 영국 런던을 자신의 아내와 거니는 한 군인,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또다른 주인공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를.
 
 
 
두 군인 - 프레드릭과 셉티머스

 

그는 뮤지컬 <르 마스크>의 프레드릭과 유사하면서도 많은 지점에서 다르다. 둘 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이고 살아 돌아온 군인으로, 전쟁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러나 프레드릭은 그 후로 쭉 혼란스러워하지만, 셉티머스는 더더욱 차분해진다. 소설 속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 본성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게 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셉티머스 또한 공포를 느끼고 착란을 경험해, 전쟁에서 죽은 친구 ‘에번스’와 대화를 나누거나, 셰익스피어의 책들을 탐독하며 시인처럼 생각하고 중얼거리고 세상의 신비로운 이미지들을 관찰하게 된다. 그러나 상처를 받은 사람으로 뚜렷하게 인식되는 프레드릭과 다르게 셉티머스는 차분한 인간으로 변해버려 기인이 된 것처럼 보여진다. 두 인물이 각각 전쟁이 안긴 상처와 전쟁이 불러일으킨 인간성의 탈락을 보여주고 있는 거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대했던 태도도 다르다. 프레드릭은 레오니의 제안을 처음엔 거부하지만, 점차 마음을 열고 활기를 되찾아가며 가면이 완성되길 기다리게 된다. 셉티머스는 의사들-‘홈스 경’과 ‘브래드쇼 경’-과 불화하며 그들을 극도로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의사가 그를 요양원에 격리시키려고 찾아오자 방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같은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셉티머스가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자.

 
남은 것은 창문뿐이었다. 블룸즈버리 하숙집의 커다란 창문,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던지는 것은 귀찮고 피곤하고 게다가 신파적인 일이었다. 그건 그 사람들 식의 비극이지, 그나 레치아(그녀는 그의 편이니까) 방법은 아니었다. 홈스나 브래드쇼는 그런 일을 좋아한다. (그는 창턱에 앉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보자.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햇볕이 쨍쨍했다. 다만 인간들이-대체 그들은 뭘 원하나? 맞은편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한 노인이 그를 쳐다보았다. 홈스가 문 앞에 왔다. 「옜다, 봐라!」 그는 외치며 필머 부인의 울타리 철책으로 곧장 몸을 던졌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열린책들(2009), p.195.
 
 
셉티머스도 프레드릭과 마찬가지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겐 아내 루크레치아가 곁에서 계속 그를 낫게 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그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건 왜일까. 그가 전쟁 후 도달한 영혼의 상태한테,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의 상처를 메꾸려는 이성들의 논의가 구속 그 자체였던 게 아닐까 싶다. 똑똑해서 한 국가를 지배하게 된 몇몇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전쟁이 세계를 박살내버리고 거대한 악의 블랙홀 만들어 박살낸 세계를 빨아들여 버렸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죽음으로 내몰린 게 아니라, 살고 싶기 때문에 지금의 악으로 가득한 세계 대신, 죽음을 더 나은 세계라 생각하고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살고 싶어서 삶으로 돌아온 프레드릭과 달리, 셉티머스는 살고 싶어서 죽음을 택한 걸지도 모른다.
 
 
 
전쟁 대신 죽음을 선택한 작가들 - 버지니아 울프와 슈테판 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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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엔 전쟁의 상흔이 많이 등장한다. 회화적이고 아름다운 소설 <등대로>에는 램지 가족이 별장에서 떠난 후, 전쟁이 휘몰아쳐 몇몇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죽어버리는 대목이 있다. 가족들이 별장에 모여 식사를 하고 바다를 구경하고 산책하는 장면에 대부분의 지면이 할애된 것과 달리 아주 짧게 지나가는 파트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자아내는 비애감은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과 맞물려 인간사에 대한 많은 생각이 휘몰아치게 만든다. 버지니아 울프 자신도 전쟁에 괴로워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 쇠약 증상이 발발하려 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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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뛰어난 지성으로 세상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써내려가던 작가가 생을 등졌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뛰어난 소설과 평전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도 전쟁 도중 자신의 아내와 같이 생을 마감했다(1942년 2월 22일). 그의 유서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이 긴 밤이 지나면 떠오를 아침노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무 성급한 이 사람은 여러분보다 먼저 떠납니다.

『감정의 혼란』, 슈테판 츠바이크, 서정일 옮김, 녹색광선(2019), p.213
 
 
이 표현을 보게 되면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다만 지금이 밤이라는 것만 알 수 있는 어둠에 갇힌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젠 그래야 할 것이다

 

치유의 뮤지컬을 보고 나서 이런 어두운 이야기들, 괴로워하다 끝내 절망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이들을 떠올렸던 건, 그 긴 밤에 부스러기처럼 스러져 간 이들을 애도하고, 그 밤에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밤이 찾아오지 않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느껴서인 것 같다. 

 
 

르마스크_공연 사진_레오니 역 박란주, 프레데릭 역 현석준_제공 이모셔널씨어터.jpg

 
 
시간이 가진 망각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토록 어두운 밤을 몰고 온 게 자연의 법칙이나 순리가 아니라 인간의 악의라는 걸 그때로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 까맣게 잊어가는 기억 속에 더욱 새까만 밤이 찾아올 것만 같다. 각박해지고 교묘해지는 세상에 군림하는 욕망하는 자들에 의해 세상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이 아수라장을 외면하고 눈 감는다면, 그건 더 빨리 밤이 찾아오도록 자극하는 일이 될 뿐이다. 더 많은 초상가면이 필요한 세상은 얼마나 아픈 세상일까. 뮤지컬로 애도와 치유의 힘을 보게 된 나는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약속하는 선의 힘을 기원해본다.
 
 
 

에디터 안태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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