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미술관
늦은 밤, 미술관에서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옆에 서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 순간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영국의 미술관들은 전시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통해 방문객들에게 다가간다. 그중 한국인인 내가 갓 런던에 도착했을 때 가장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던 행사는 ‘뮤지엄 레이츠(Museum Lates)’*였다. 저녁 시간에도 전시 관람이 가능한 ‘야간 개장’의 개념을 확장하여 전시는 물론 음악, 워크숍, 공연 등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복합 문화 경험을 제공한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뮤지엄 나잇’이라는 표현을 쓸 가능성이 높다.
런던의 테이트(Tate) 재단은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브리튼에서 늦은 밤까지 미술관에서 다양한 식사와 음료,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문화 행사 “Tate Lates”을 운영한다. 음악과 음료 외에도 예술 영화 상영, 토크, 야간 투어 등을 통해 미술관 본연의 콘텐츠도 제공한다.

Tate Lates 현장 사진. 터빈홀 전시의 대형 설치 작품과 DJ의 음악이 어우러지는 이색적인 분위기는 미술관만이 자아낼 수 있는 듯하다. 사진의 작품은 2023년 터빈홀 작품으로, 엘 아나츄이(El Anatsui)의 작품이다. 그는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수거한 병뚜껑을 엮어 직물처럼 만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출처: 직접 촬영
빅토리아 앤 앨버트 (Victoria & Albert, 이하 V&A) 또한 매주 금요일 ‘V&A Friday Lates’을 통해 방문객들의 이목을 끈다. 특히 V&A는 매주 특정 테마를 선정하여 다양한 동시대 예술인들과 협업해 오고 있다. 오는 8월 29일의 키워드는 ‘Future Margin’.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문화 다양성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그룹 ‘Eastern Margins’와 함께 아시아의 문화 정체성을 경험할 수 있는 음악, 퍼포먼스, 큐레이터 투어, 워크숍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V&A는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동시대적 의제를 다루는 단기 설치 전시와 아티스트 협업은 기관이 과거의 유물을 통해 현대와 소통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시도가 될 수 있다.

V&A의 Friday Lates 현장 사진, 로비 천장의 유리 작품은 유명 유리공예가 데일 치훌리 (Dale Chiuly)의 작품으로, 라스베가스의 벨라지오(Bellagio) 호텔 천장에도 그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조명을 반사하며 생동감을 자아내는 듯하다.
출처: 직접 촬영

V&A Friday Lates 안내 웹사이트 캡처 이미지
뮤지엄 레이츠, 재원 마련과 마케팅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최초의 뮤지엄 레이츠는 1997년 독일 베를린에서 ‘박물관의 밤(Lange Nacht der Museen)’이라는 도시 단위의 문화 행사로 시작되었다. 이 행사를 기점으로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유사한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뮤지엄 레이츠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재원 마련과 마케팅이다. 마케팅 자체가 재원 마련을 위한 경영 전략의 일부이지만, 직접적인 판매 수익과 뮤지엄 레이츠 방문객의 충성 고객 전환율을 구분하고자 ‘두 가지’로 표현했다.
대부분의 야간 행사는 간단한 음료와 식사를 판매한다. 방문객들은 허가된 구역 내에서 구매한 식음료를 들고 자유롭게 미술관을 누빌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야간 개장처럼 전시와 아트숍도 함께 운영하기에 평소에 일이나 학업으로 미술관에 방문하지 못했다면 행사를 계기로 유료 전시를 관람하거나 점찍어두었던 기념품을 구매할수도 있다.
아트 뉴스페이퍼(Art Newspaper)의 개럿 해리스(Gareth Harris)의 기사에 따르면, 지난 5월 테이트 모던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뮤지엄 레이츠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들이 운영된 3일 동안 약 76,000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또한, V&A의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V&A의 Friday Lates 중 가장 많은 수의 방문객을 기록한 테마는 “Fabric and FolkLore”로, 당시 5,000명이 행사에 방문했다고 한다. 테이트 모던의 76,000명은 주간 방문객도 포함된 수치이기에 뮤지엄 레이츠 방문객만 고려할 경우 약 5,000-10,000명 정도가 다녀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인원의 음료, 티켓, 기념품 소비량을 고려했을 때, 뮤지엄 레이츠는 미술관의 직접적인 매출에 높은 기여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마케팅 측면에서는 젊은 층을 충성 고객으로 전환하기에 효과적이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매번 새로운 음악과 공연은 이색적인 경험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자기표현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대상이다.
실제로, 2018년 Thrive라는 영국의 문화예술 리서치 기관에서 진행한 북아일랜드 지역 뮤지엄 레이츠 사례 조사 프로젝트의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행사 방문객 나이는 40세 미만이었다. 또한, 68%의 방문객이 뮤지엄 레이츠 참여를 통해 박물관 및 미술관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응답했으며, 86%의 방문객이 추후 다른 유사 행사에도 방문할 의향을 밝혔다.
개럿 해리스의 기사에서는 뮤지엄 레이츠를 통해 테이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만 16~25세의 청년들이 해당 나이대에 가입할 수 있는 멤버십인 ‘Tate Collective’**의 가입자가 되어 혜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미술관의 전시와 카페 등 부대시설을 이용한다고 밝혔다. 뮤지엄 레이츠를 통한 관심 유도-멤버십 가입-미술관 이용-매출 증가의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만 16-25세만 가입 가능한 무료 멤버십으로, 특별전을 5파운드에 관람할 수 있고 카페와 아트숍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참고로 계정 생성 시 구체적인 개인 정보를 묻지 않으며, 멤버십 이용 시 생년월일 확인을 위해 엄격하게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조만간 런던 여행과 테이트 모던 방문을 계획하고 있으나 아쉽게도 만 25세의 범주에 벗어났지만 외국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을 보유한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기를 바란다.
뮤지엄 레이츠, 방문객 유도와 전시의 본질적 가치 개발의 방안
재원 마련과 청년층 대상의 마케팅 효과는 뮤지엄 레이츠를 운영하는 기관의 연간 보고서나 관련 논문에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다. 내가 생각하는 뮤지엄 레이츠의 또 다른 이점은 전시 기획 시 방문객들이 소위 ‘인스타그램 스팟’으로 선호할만한 구역을 의도적으로 구성하지 않으면서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경험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들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의 가장 많은 방문객 수치를 기록한 동시에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얻었던 현대미술 전시가 있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론 뮤익’ 회고전이다. 현장에서 2시간 동안 줄을 서야 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담당 큐레이터가 방문객 증가를 위해 프레스 행사에 인스타그램 매거진 관계자들도 적극적으로 초대했다는 내용을 밝히며 성공적인 미술관 마케팅 사례로도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다.
한편, 일각에서는 전시의 인기만큼 ‘론 뮤익’이라는 작가가 현대미술사에서 지니는 의미와 그의 작품이 지니는 서사가 대중들에게 깊이 있게 전달되었는가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저 ‘크고 사실적인 인물 조형이 있었던 전시’, ‘인기 있었던 전시’로 기억에 남았을 뿐, 작가가 관람자들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 그가 과장된 크기의 인물을 구현하는 이유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까지는 파급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인증샷을 올리기 위해 작품 감상보다 사진 촬영에 정성을 들이며 타인에게 불편을 끼친 일부 방문객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지만 론 뮤익 전시는 그 흥행 지표로 인해 최소한 본전은 챙겼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티켓 판매와 보조금 마련이 간절한 미술관들이 많다. 소셜미디어 업로드가 목적인 방문객들도 티켓값을 지불하고 그들만의 향유 방식을 추구했을 뿐이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그들이 시각예술에 흥미를 지니거나 정기적인 미술관 탐방을 취미로 삼을 수도 있다. 물론 타인의 편의를 침해하는 수준의 행동에는 제지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제도적 기관에서 열린 전시가 인스타그램 스팟으로만 여겨지기보다는 관람자들이 전시를 탐험하며 그들만의 인상을 남기는 양상이 조금 더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관점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낸 듯하다. 직접 론 뮤익 전시를 방문하여 감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시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뮤지엄 레이츠는 방문객 유치와 전시 본연의 가치 사이의 균형에 대한 딜레마 속에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 특유의 고리타분하고 전공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전환하고 새로운 방문객들과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나 전시에 대한 관심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간에 음악을 틀고 음료와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문화가 ‘시장’의 영역에서는 한국에서도 제법 흔하다. 방문객들에게 다과를 제공하는 갤러리 오프닝 행사가 많으며, 프리즈 서울 런칭 이후 ‘청담 나잇’이나 ‘갤러리 나잇’ 등의 이름으로 드레스코드와 함께 파티를 여는 갤러리들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2023년 ‘밤샘 미술관’이라는 야간 행사 이벤트를 개최한 적이 있다. 1층 로비의 디제잉과 영화 상영, 다도와 저녁 식사 등 영국 미술관의 뮤지엄 레이츠와 비슷한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2만원이라는 티켓 비용과 주류 판매는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모든 행사 수익금은 기부했다는 점이 차이를 보인다. 행사가 다음날 6시까지 이어져 말 그대로 ‘밤샘’인 것도 놀라웠다.
뮤지엄 레이츠가 국내에도 도입되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긍정하기는 어렵다. 방문객 동선 관리, 밀집된 인파 속 작품 훼손 방지를 위한 계획안 수립, 쓰레기 처리 방안 등 사전에 대비해야 할 사항이 많다. 그렇지만 신나는 음악 속에서 터빈홀의 작품을 감상했던 경험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익숙한 나에게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뮤지엄 레이츠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미술관이 방문객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용자 증가뿐 아니라, 기관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를 떠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