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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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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말 좀 들어줘>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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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버거운 시대. <내 말 좀 들어줘>는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참지 못해 집이든 거리든 마트든 어디서나 트러블을 만드는 ‘팬지’와, 그런 그녀를 묵묵히 감싸는 유일한 존재인 여동생 ‘샨텔’의 이야기를 그린다. 남편과 아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어머니의 날’ 가족 모임에서 팬지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면서 그동안 쌓여온 감정의 균열이 드러나고, 가족은 서로가 미처 몰랐던 마음의 속살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라기보단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너-무 일상의 일면 같아서 내가 뭐 판단하기도 뭐했다. 영화의 끝도 그렇다. 관객에게 “우리 영화 이제 끝납니다–”라는 힌트조차 주지 않고, 팬지와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다 뚝- 하고 엔딩 크레딧이 뜬다.

 

뭐야, 이게 끝이라고? 싶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딱이다. 가족끼리 싸우고 나서 제대로 “내가 미안해” “나도 미안해” 하며 포옹하고 화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냥 흐지부지, 칼로 물 베듯 넘어가는 게 일상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건 포스터나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 마이클 리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할 말을 늘 참지 못하는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가족 이야기라길래 은근 기대가 생겼다. 가시가 돋친 그녀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세상에도 내 편은 있구나’라는 대사나 연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극장에 발을 들였다. 줄거리도, 상영 시간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가서 보고 판단하면 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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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 시작 1시간쯤 지났을 때 깨달았다. 아, 이건 내가 기대한 바와는 많이 다르구나. 포스터를 다시 떠올려보라. 나는 처음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팬지, 꽃, 영화 제목, 형광 연두빛 배경만 보았다. 나머지 흑백 처리된 인물들은 누군지도 모르니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다시 보니 이제야 보였다.


답답할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아들내미, 와이프가 기분 안 좋아 보이니 굳이 건들진 않지만 식사는 챙기는 남편, 나를 위로해주지만 결국 어린 시절의 애정을 앗아간 여동생 샨텔, 그리고 자신에겐 없는 활기와 생활력을 가진 두 조카. 하나같이 인간적이고,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상들이 포스터에 다 모여 있었다. 보는 내내 지칠 뻔했다. (꽃 다 치워버리자)


시작부터 한 시간 정도는 주인공 ‘팬지’가 어떻게 주변인들과 ‘트러블’을 만드는지 치밀하게 보여준다. 귓청이 피곤해질 만큼, “이런 식으로도 시비를 걸 수 있구나” 싶을 만큼 끊임없이 비방하고 힐난한다. 비트만 안 깔렸지, 이 정도면 어린애 하나는 충분히 울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악담 뒤에는 꼭 남몰래 도망치거나, 차에 멍– 하니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는 모습이 보인다. 가련하면서도 너무 내밀해서 차라리 모른 척하고 싶은 감정선이었다.


사람은 양면적이라지만, 방금 욕하신 걸 목격한 직후 아니던가? 참 곤란했다. 희한한 건, 영화의 전반부가 사람을 피로하게 만드는 말의 나열이었는데도 나는 팬지의 이야기와 상황에 점점 몰입하고 있었다.

 

팬지는 이미 지쳐 있었다. 이-미 설득도, 치유도, 대화도 불가능할 만큼 마음이 망가져 있었다. 그녀도 젊은 시절엔 꿈이 있었겠지. 부모와 가족의 사랑을 양껏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만든 이 주인공에겐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더 좋아했다.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무덤덤했다. 아들은 집에 여우가 들어오든, 엄마가 잔소리를 하든 상관없이 치킨만 뜯으며 자기 세계에 잠겨 있었다. 팬지를 이해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여동생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뿐 아니라, 활기찬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집안에는 늘 웃음이 가득했다.


샨텔의 두 딸은 어떤가. 업종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그만큼 다채롭게 실망당하고 까인다. 그럼에도 서로를 마주할 땐 그 사실을 숨긴 채 현재의 샴페인을 즐겁게 나눈다. 고통은 혼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모 팬지를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속으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 여겼을 것이다. 자신들도 굳이 드러내지 않는데, 당신은 왜 그러는가. 그 마음을 팬지도 모를 리 없다.


이런 환경에서 끊임없이 혼자인 채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고 생각해보라. 성격이 어떻게 되겠는가. 주변 지인에게 마음을 기대지도 않고, 가족이 내 편도 아니며, 취미도 종교도 없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낡은 소파 닦기, 머리 다듬으러 나가는 것뿐이다. 누구에겐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상처를 안은 팬지에겐 그 평범함이 눈에 띄게 불편하다.


그 불쾌함이 켜켜이 쌓이고 얹혀져, 결국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 동물들이 환경에 맞춰 색을 바꿔 위장하는가. 살아남기 위함 아닌가. 팬지도 자신의 연약한 내면을 지키기 위해 악에 받친 가시를 돋아낸다. 그녀는 이미 혓바늘이 입천장은 물론이고 온몸에도 돋아 있는 듯, 누군가 옷깃만 스쳐도 두통이 오고 닭살이 돋는 상태였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자동차 경적음처럼 들리는 일상이니 편할 리가 없다. 유달리 위로는 안 해주고 “왜 그래?”만 묻는 남편은 밤마다 코까지 곤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이미 예민한 성정인데 풍파에 치여 절벽 끝에 한 발로 서 있듯 버티고 있으니, 따뜻한 순풍조차 칼날처럼 느껴질 뿐이다.


포스터에 있던 그 꽃들은 그녀의 또 다른 시작을 축하하는 꽃다발 같았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라. 무거운 욕조를 옮기다 허리를 삐끗한 남편이 집에 일찍 들어와 직원을 시켜, 위층에서 곤히 자던 팬지를 불러달라 한다. 

 

팬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고, 남편도 베란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다. 두 사람은 그저 앉아 있었을 뿐. 소리쳐 달려나가는 사람도, 아프다고 부르짖는 이도 없다. 그냥 숨을 크게 내쉬거나 멍– 하니 있을 뿐이다.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게 무엇일까. 무관심이다. 조용한 무관심. 포스터 속 꽃들은 그런 두 사람의 ‘안녕’을 고요히 축하하고 있었다. 애먼 나만 낚였다. 나는 결국 팬지가 누군가를 통해 공감받으며 웃는 결말을 기대했는데, 감독은 오히려 주인공의 시선과 심경을 관객에게 정조준시켜 토로했다. 

 

"너희가 얘 말 좀 들어줘라!"


팬지는 고장 난 망치 로봇였다. 누군가 나를 공감해줄 거라는 기대조차, 여동생 샨텔을 제외하면 하지 못한다.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철문을 닫아놓은 탓에 들어오는 건 과거의 반복과 왜곡뿐이다. 작은 것도 뒤틀어 보고, 조금의 무관심에도 성의 없다고 판단한다. 

 

여리기에 더 강하게, 더 크게 소리친다. “나 건들지 마! 이 이상 나는 지쳤고, 피곤하다!” 남이 나를 판단하기 전에 그 입을 틀어막아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내려는 선언 같았다.

 

그럼에도 팬지는 사람이었다. 일전에 본 SNS 게시물이 떠올랐다. 아이가 없는 사람이 부모가 된 친구에게 “애 낳으면 어떤 기분이야?” 하고 묻자, “애기가 웃는 건 최애 아이돌이 나만 보며 웃어주는 느낌. 그런데 그 최애를 내가 낳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 보고 딱 깨달았다. 아– 부모는 아이를 그렇게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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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답답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낳은 ‘최애’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의 날, 아들이 꽃다발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자 미친 듯 웃다가 울어버린 것 같다. 꽃 하나에 담긴 작은 정성이 사람을 그렇게 무너뜨리고, 동시에 녹여버리는 것이다.


실용적인 사람에겐 작은 소품 선물이 고맙지만, 어떻게 써먹어야 하나 고민될 때가 있다. 하지만 꽃다발은 크기나 가격과 상관없이 의미가 다르다. 금방 시들어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도 손과 손 사이로 꽃이 건네지는 그 순간의 마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곧 이별할 것을 알면서도 손에 피어난 것을 내어준다.


지친 몸으로 돌아와 꽃다발을 조심스레 다루던 여자의 손길이 기억난다. 그렇게 소중할까? 인생이란 도대체 뭘까. 혼자가 되기 싫어 결혼했는데, 오히려 더 고립되었다. 남편과 아들도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는 팬지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애초에 그녀를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최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 내 밥, 내 산책, 내 침대가 우선일 뿐이다. ‘왜 저 사람이 세상을 저렇게 보는가?’에 대한 관심은 없고, 틀린 말은 그냥 정정만 해줄 뿐이다. 결국 이유는 단순하다. 안궁금하니까! 


차라리 팬지는 정말 ‘혼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 온갖 사람들과 부딪히며 끊임없이 마음 없는 소리를 내뱉을 때도, 결국 눈으로만 토로하지 않았던가. 

 

“내 말 좀 들어줘… 누가 내 말 좀 들어줘…”


하지만 이미 가시에 찔린 상대는 자기 흉에 몰두하느라 그녀의 초점 잃은 시선을 끝내 마주하지 못한다. 마주할 이유도 없다. 왜냐면 너와 나는 남이니까. 결국 팬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다.


꽃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주저앉은 소파는 내버리고, 온라인에서 폭신한 2~3인용 소파를 사서 햇살 드는 거실에 누워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과의 교류에서 완전히 멀어져, 진짜 ‘혼자’가 되어 1:1로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 필요해 보였다. 끝내주는 인내심을 가진 심리상담사가 곁에 붙어도 좋겠다.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심은 아님을 한 번이라도 눈치채줄 사람이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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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지를 보며 생각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 되기까지, 

혼자 두지 말아야지. 그러지 말아야지.

 

“내 말 좀 들어줘…” 하고 한참을 토로하기 전에 

“네 말 좀 들어줄걸…” 하고 후회하기 전에

 

뒤에서 졸졸 따라오다 뒤돌아봤을 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냥…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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