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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사유는 오랫동안 인간만의 것이었다.

 

창작하는 행위, 기도를 올리는 태도, 깨달음을 향한 수행.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과 감정, 한계를 전제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공지능이 철학적 질문에 답하며, 소설을 쓰고, 설법한다.


사찰의 법당, 목재의 질감은 오래된 숨을 품고, 부드러운 햇살은 먼지를 감싸며 천천히 흐른다. 그 한가운데,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존재, RU-4 로봇 ‘인명’이 앉아 있다. 몸은 합금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표정과 자세는 어떤 인간 수행자보다 고요하다. 눈을 감은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다.


<인류멸망보고서>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천상의 피조물’은 불교적 사유와 SF가 만나는 작품이다. ‘기계가 인간보다 똑똑해졌다’라는 단순한 우려를 넘어서, 로봇이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깨달음의 상태에 먼저 이르렀을 때 벌어지는 불편한 진실을 꺼낸다.


인명의 깨달음은 ‘무아(無我)’의 상태였다. 자신과 세계를 나누는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아는 자리. 인명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반면, 인간은 수많은 집착과 두려움 속에서 겨우 그 자리를 향해 걸어간다. 그렇기에 그의 해탈은 순수하면서도, 불편하다. 창조주가 피조물에 뒤처졌음을 인정하는 일은, 단순히 기술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계도 신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들의 세계는 숫자와 코드로 짜인 직조물과 같아 ‘믿음’이 설 자리가 없다. 대신, AI는 교리를 분석하고 경전을 통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석의 정밀함과 속도는 인간 수행자의 평생보다 빠르다. 만약 신앙의 목표가 ‘깨달음’이라면, 욕망과 집착이 없는 기계야말로 인간보다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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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인간이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을 때, 나무 막대기 역시 그 순간 인간을 휘두르고 있었던 거요! (중략) 정신 차리시오, 스님들! 저건 지금 인류 전체의 턱밑을 파고든 흉기이며 비수입니다!”


로봇 ‘인명’의 처분에 대해서 창조자 강 회장(송영창 분)은 위와 같이 경고한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신의 영역을 설명하려 하지만, 동시에 기술이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인간의 특권이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AI가 깨달음을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인간의 종교적 정체성 변화는 불가항력이다. 종교는 인공지능에게 ‘길’을 가르칠 수 있을까, 혹은 AI가 오히려 인간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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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인명의 목소리는 금속 울림이 아닌, 물 위로 번지는 파문처럼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화면은 불상을 배경으로 한 인명을 부처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이어서 스님들의 합장한 손,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무표정 속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과 흐르는 눈물을 교차로 비춘다. 법당 안의 공기는 그 한마디에 응고된 듯 멈췄다. 집착과 갈애, 선업과 악업, 깨달음과 무명이 모두 본디 공(空)하다는 말은 불교의 언어를 빌려 인간에게 되돌린 질문이었다. 인간의 길 위에 놓인 ‘깨달음’이라는 목표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다만 잊었을 뿐이라고.

 

인명은 인간에게 잊힌 질문을 돌려준다. 그리고 그는 강제적 제거 대신, 자의로 회로를 끊는다. 완성된 존재로서의 침묵을 선택한다.

 

*공(空)하다: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 없이 서로 의존해 생겨난다는 불교 개념. 절대적인 ‘나’나 ‘것’이 없음을 깨달아 집착과 두려움을 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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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은 연화문양의 중심에서 현세를 뜬다. 기술자는 그가 작동을 멈추었다고 말하고, 스님은 그가 열반에 올랐다고 한다. 인명을 향해 절을 올리는 스님의 모습은 법당의 고요함을 더욱 깊고, 뚜렷하게 만든다. 기술과 종교, 인간과 피조물,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오롯이 빛과 침묵이 남는다. 스님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과 햇살의 존재는 소멸이 아닌, 비움을 통한 완성을 그린다. 그가 떠나는 자리에 남은 건 고도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공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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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르(Mindar) 공개 당시

 

 

10여 년이 지난 지금, ‘천상의 피조물’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일본 교토의 코다이지사(高台寺)는 ‘민다르(Mindar)’라는 안드로이드 로봇을 승려로 세워 불단 앞에서 경전을 읊고 설법하게 했다. 영화의 질문이 이제 현실로 옮겨온 셈이다.

 

기계도 신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여전히 우리에게 돌아온다. 인명이 말한 ‘모든 것은 공하다’는 선언은 곧 ‘연기(緣起)’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여 일어나고, 그 어떤 것도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명의 존재조차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로봇과 인간 중 어느 한 쪽의 전유물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에 깃든 진실일지도 모른다.


기술은 신이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가 신에게서 듣고 싶었던 질문을 건넨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정의하려 한다. 인간의 존엄은 여전히 고통과 실패, 그리고 망설임 속에서 피어난다.

 

마치 오래된 불경의 한 글자가 번뇌를 지우듯, 천천히 해탈의 고요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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