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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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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선율>은 장례식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수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눈물 콧물 범벅이여야 할 것 같은 수연의 표정은 의외로 덤덤하다. 하나뿐인 보호자였던 할머니를 잃었다는 슬픔 너머로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막막함이다. 등본상 할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행방불명인 상태. 이대로라면 보육원에 가야 한다. 수연은 나고 자란 할머니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 결국 스스로 보호자를 찾아 나서겠다는 과감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마음 편히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다. 어릴적 친구네 가족은 수연을 내치지는 못하지만 이대로 눌러앉을까 봐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수연을 좋아한다며 추근거리는 교회오빠는 위협에 더 가깝다. 따뜻한 말을 건네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자기 자식이 최우선인 목사 부부도 수연이 기대하는 집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수연은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사는 한 입양가족을 발견하고 희망을 품는다. 일곱 살인 선율을 입양해 키우는 부부는 유튜브에서 가족 채널까지 운영하는데, 심지어 아이를 한 명 더 입양할 계획까지 갖고 있다. 표현성 언어장애가 있는 선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극정성 키우는 동영상 속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수연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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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보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이 더 절대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는 자신의 생명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생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가 주는 사랑과 돌봄이 절대적이다. 수연에게도 이 일은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그렇기에 아주 전략적으로 부부의 입양딸인 선율에게 접근한다. 예상과 달리, 어설픈 도박 같던 수연의 작전은 의외로 잘 풀린다. 우연을 가장해 선율과 친해지더니 선율의 엄마와도 가까워진다.


수연과 선율 엄마의 관계에서 관객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보통 상호간의 선의 속에서 오갈 것이라 기대되는 돌봄이 일종의 전략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연은 이 가족의 눈에 들기 위해 선율을 돌보고, 선율 엄마는 그런 수연이 좋은 언니가 되어줄 거라 말하며 수연의 입양을 결정한다. 차라리 재화와 돌봄이 규칙에 따라 분명하게 교환되었다면 관객 입장에서 마음은 더 편했을 것 같다.

 

보는 관객은 어쩐지 불안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무탈히 진전되는 수연과 선율 가족의 관계. 물론 복선은 존재한다. 왜 선율은 수연 앞에서는 말을 곧잘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버리는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율의 엄마와 수연 사이에 이렇게 공통점이 많을 수 있는 걸까... 그러나 관객도 수연도 드디어 집다운 집을 찾았다는 기쁨에 의심은 흐릿해진다. 거짓말 같아도, 세상에 거짓말 같은 인연 하나는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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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길한 징조는 수연이 드디어 집다운 따뜻함을 느낀 다음날 현실이 된다. 부부는 두 아이만 남겨놓은 채 사라지고, 아이들만 남겨진 집에는 빚을 독촉하는 사람들까지 찾아오기 시작한다. 선율과 수연의 관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이전까지 이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한 유용한 도구였던 선율이 이제는 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수연은 선율이 어떤 아이인지 똑바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선율 역시 자신처럼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한 전략으로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연기를 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동질감 때문일까. 수연은 선율을 성가셔하고, 선율을 떨쳐낼 기회가 있었음에도 차마 그러지는 못한다.


선택받고 사랑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두 아이는 처음으로 서로의 맨얼굴을 마주한다. 그렇게 삐걱거리고 어설프지만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둘만의 세계는 선율이 비밀장소에서 몰래 기르던 곤충 통을 닮았다. 다친 곤충들을 모아 돌봐주던 선율은 나중에 수연의 집에 와서 이곳이 그 통 같은 곳이냐 묻는다. 수연은 퉁명하게 대하지만 막상 선율이 위기에 처하자 망설임 없이 그 앞을 막아선다. 거기엔 어떤 전략도 없었다.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우산 없이 걸어도 둘은 함께다. 빗속에서 선율은 물방울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우리 둘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방울 안 둘만의 세계가 이대로 지속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들은 이제 겨우 열세 살, 일곱 살이다. 현실에서 두 아이가 보호자 없이 계속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는 없다. 살던 집은 재개발될 것이고, 지금은 방학이지만 이제 학교도 나가야 한다. 선율의 부모가 수배에 올라 경찰이 사라진 선율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결정적으로 행방불명 상태였던 수연의 할아버지가 발견되며 둘은 헤어진다. 수연은 할아버지와 살고 선율은 보육원에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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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된 수연이 선율이 있는 보육원에 찾아가 선율을 멀리서 지켜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섣불리 부르지도, 다가가지도 못하는 것은 그새 수연도 자신이 선율에게 완전한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자라서일 것이다. 수연이 어른이 된다면 선율을 데리러 올까? 아니면 어른들이 수연에게 지었던 표정을 똑같이 지으면서 선율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아갈까.

 

<수연의 선율>의 장르는 스릴러로 표기되어 있다.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의아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여느 스릴러처럼 마음을 졸여야 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혼자가 된 아이의 안전은 위태롭고, 사랑받기 위해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아이의 모습은 애잔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어른에게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를 매순간 확인해야 하는 아이의 심정을 영화는 매우 현실적으로 전달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수연의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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