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좋을 때’라는 말. 십대에서 삼십대에 걸쳐져 있는 청춘이라면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뜨거운 열정과 무한한 잠재력이 샘솟는 이 연령대는 인생의 황금기처럼 여겨지곤 한다. 이미 청춘을 지난 사람에게 젊은 날은 빛나는 시기로 인식되겠지만, 지금 당장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과연 그럴까?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주인공 제임스(알렉스 로더 분)와 앨리사(제시카 바든 분)의 청춘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이들이 통과 중인 십대 후반, 엄밀히 말하자면 성인의 세계에 진입하기 바로 직전의 시기는 행복과 웃음이 보장되지 않는다. 긍정의 기운이 사라진 공백에는 비관, 허무가 자리하고 울음마저도 잘 터지지 않는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우중충한 영국의 날씨와 맞닿아있는 채로 나아간다.
드라마 초반부터 충동적인 가출을 벌이는 제임스와 앨리사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제임스는 끓는 기름에 손을 넣거나 작은 동물을 해치면서 스스로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고 믿는다. 이 끔찍한 행동의 원인은 단순하다. “뭔가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행을 벌여도 감정의 동요가 생기지 않자 제임스는 살인을 벌이겠다는 결심까지 하고 어느 날, 자신에게 무방비하게 다가온 앨리사를 타깃으로 삼는다. 그리고 친아버지를 찾기 위한 가출에 동행하자는 앨리사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수락한다. 단둘이 있으면 살인을 벌이기 쉬워질 테니까.
그러나 제임스의 바람은 마음처럼 실행되지 않는다. 앨리사의 통제 불가능한 성격이 변수로 작용한 것이다. 앨리사는 말끝마다 욕설을 붙이고, 황당한 요구를 자주 하며, 모두에게 예의 없이 군다. 제임스가 본인을 살해할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앨리사는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하고, 운전하고 있던 제임스는 이로 인해 자동차 사고를 내고 만다. 끔찍한 계획을 세운 제임스마저 날뛰는 앨리사에게 말려들고 만 것이다.
이들은 어쩌다 상식 밖의 사고를 가진 십대로 성장한 걸까? 제임스와 앨리사에게는 공통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슬픔’이 존재한다. 어린 시절, 제임스는 자신의 눈으로 어머니의 자살 현장을 목격했고, 앨리사는 회피적인 어머니와 손버릇이 나쁜 양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자랐다. 행복 한 줄기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상. 제임스와 앨리사는 슬픔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방식 대신 서툴고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그걸로 될까? 소란은 고통을 잠시 잊는 데 유효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해 주지 못한다.
“때로는 모든 게 정말 순식간에 간단해지죠. 모든 게 한순간에 바뀌어버리는 것 같아요.” 우울증을 인지하지 못하는 제임스와 앨리사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고 만다. 수중에 있던 돈이 전부 떨어지자, 두 사람은 빈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묵기로 한다. 무단으로 들어간 타인의 집에서 제임스와 앨리사는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흥겨움에 취한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이 집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제임스와 앨리사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집주인 클라이브(조나단 아리스 분)가 들어온다. 저명한 철학 교수인 클라이브는 멀쩡한 겉모습과 달리 여성들을 착취하고 살해하는 범죄자였다. 혼자 누워 있던 앨리사는 갑자기 자신을 덮치려는 클라이브로 인해 공포에 질리고 만다. 그때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제임스는 앨리사를 죽이는 데 사용하려고 했던 칼로 클라이브를 살해하고, 이를 기점으로 두 청소년의 일탈은 핏빛으로 물들게 된다.
상처로만 점철된 가정사,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기질, 그리고 추가된 살인범이란 주홍 글씨. 불행은 제임스와 앨리사의 속도 모르고 자꾸만 덧칠된다. 화면 속 색감은 두 사람이 가출을 감행했을 때보다 어둡고 꿉꿉한 색으로 변질된다. 습기마저 느껴지는 이 색감 속에서 제임스와 앨리사의 얼굴은 경찰에게 체포되리란 걱정으로 창백해진다. 이에 더해 피로 범벅된 살해 현장까지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제임스와 앨리사는 불안 속으로 점점 가라앉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시무시한 불행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살인을 벌인 제임스를 견딜 수 없었던 앨리사는 말도 없이 홀로 떠나버린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제임스는 짙은 푸른 색으로 가득한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곧 다가올 어둠을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있는 제임스에게는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이 주어진다. 여기서 그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딱딱한 응어리를 꺼내고 큰 울음을 터뜨린다. “그날 알게 됐죠. 고요함이 실은 울림이 크다는 걸요. 귀청이 터질 정도로요. 어쩌면 아버지도 평생 침묵을 피하려 하셨는지도 모르죠. 고요한 상황에서는 뭐든 막아내기가 힘들죠. 다 거기 있거든요.”
이제 제임스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응시한다. 본인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사실, 앨리사를 해치려고 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그는 형편없는 자신을 지켜준 앨리사가 올 때까지 카페에서 기다린다. 앨리사 역시 난장판 같은 마음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제임스가 원망스러운 한편, 곤경에 처했을 때 (잔인하긴 해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 더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제임스에게 돌아간다.
해가 뜨기 전,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바닷가에서 제임스와 앨리사는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지금까지 해 본 적 없는 가장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이때, 점점 동이 튼다. 환한 대낮에 비하면 어둡지만, 색채를 머금은 한 줄기의 빛은 회색빛이었던 두 사람의 마음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우린 세상 끝에 와있는 것 같았죠. 안전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실제론 아니었죠.” 도망을 꿈꾸고 있음에도, 불가피한 처벌이 예견되어 있음에도, 이들은 상처를 꺼내 보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 이 순간을 만끽한다.
작품 말미에 다다를 때까지 제임스와 앨리사는 악몽 같은 나날을 겪기만 할 뿐, 극복하지는 못한다. 꼭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불운을 꼭 이겨내야만 할까.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불운마저 이해의 범주 안으로 진입했지만, 우리가 반드시 불운을 받아들이고 용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이건 뭘까’ 하고 질문하는 태도다. 제임스와 앨리사의 미래에 우중충한 불운이 더는 없을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변화를 통해 우리는 엔딩에서 그들이 환하게 웃지 않아도 안심하게 된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세계는 자극적이고 울적한 방식으로 청춘과 성장을 말한다. 이 방식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납작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트라우마와 상처를 직면할 필요성, 사람과 사랑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내비친다. 젊은 연령대를 '한창 좋을 때'라고 규정하지 않고, 그저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빌어먹을 세상 따위>식의 청춘 서사는 충분한 위로를 안겨준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청량함과 열정만을 강조하는 서사보다 '나의 밑바닥'과 닮은, 어두운 이면을 조명하는 작품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