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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에세이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직된 사고, 유연한 남탓’. 한 스트리머로부터 파생된 일종의 밈 문장이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남탓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점차 참을 수 없을 만큼 사고가 경직되고, 그라데이션 분노로 인해 도치된 문장. ‘유연한 남탓’이란 게 결코 좋은 의미로 쓰이는 문장은 아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멘탈 케어를 위해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나 싶다. 내 잘못도 아닌 것을 내 잘못으로만 받아들이는 건 그다지 건전한 사고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아쉽게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 역시 쉽사리 타인에게 잘못을 전가하지 못 한다. 우선 첫 번째, 나라는 존재가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고. 두 번째, 뭔가 대단한 존재도 아닌 나 따위가 감히 타인에게 뭐라 말할 처지가 못 되고. 세 번째, 그렇기 때문에 그냥 내 잘못으로 치부해버리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 그냥 다 내 잘못이다.”하고 체념해버리는 게 훨씬 나은 결과를 종종 가져온 것이다. 물론 그 만큼 정신은 썩어들어갔겠지만.
내 존재의 무의미함과 무관한 다른 생각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기를, 아니면 가능한 우리 가족에게 방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기를
주인공 길다는 20대 후반의 무신론자이자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매체에서 흔히 얘기하는 INFP가 가진 모든 단점의 집합체다. 사회부적응자 모습도 보이고, 자격지심, 자기혐오 등의 모습도 갖추고 있다. 길다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찐따다.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제대로 못 하면서 생각으로는 온갖 잡다한 생각과 영웅적 사고를 펼친다.
길다는 다니던 회사에서 무단 결근으로 인해 해고를 당한다. 이유는 그저 못 일어나서, 못 가겠어서다. 운전을 하다 딴 생각에 빠져 교통사고를 당하고(다행히 과실 0%의 사고였다), 팔까지 부러져 깁스를 하게 된다. 이후에는 정처 없이 거닐다 교회에 방문하게 되는데, 신자가 아니라는 한 마디를 못해서 교회의 회계 업무로 취업을 하게 된다.
길다가 대체하게 된 자리는 ‘그레이스’라는 노년의 여성 분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면서 맡게 되었다. 아무도 그레이스가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TV 뉴스를 통해 그녀가 특정 약물 주입을 통해 사망하게 된 사실이 퍼지게 되면서, 길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교회 사람들의 행보를 의심하고 추적하기 시작한다.
사실, 내용 중 일부 말이 되지 않는 장면들도 있다. 그레이스의 죽음에 대한 용의자로 경찰은 길다를 지목한다. 아니, 일면식도 없는 그레이스를 길다가 왜?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레이스의 자리를 길다가 갑작스럽게, 꽤 빠르게 차지하게 된 것. 그레이스가 이미 고인이 된 시점에 그레이스의 친구 ‘로즈메리’에게 거짓 메일을 보낸 것. 길다가 검색창에 ‘살인’과 관련된 단어들을 검색한 것. 동성애자인 사람이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 등등. 뭐, 솔직히 이상할 순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길다가 회사 못 가겠다고 해고를 당하고, 딴 생각하다 교통사고 당하고, 그냥 지나가다 운 좋게 교회에 취직하게 된 일련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길다는 너무나도 답답한 행보를 보여 나에게 책을 덮고 싶게끔 만들었다.
길다는 경찰의 말 같지도 않은 심문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 한다. 제대로 된 변명도 못 하는 그녀이기에 경찰은 길다의 가족에게까지 연락을 하게 되는데, 가족들의 걱정 어린 질문에도 길다는 “내가 한 게 아니야.”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무시한다. 침묵도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현 상황에선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길다는 다행히도 이미 고인이 된 그레이스의 유언장 덕분에 혐의에서 풀려나게 된다.
길다가 로즈메리에게 거짓 메일을 보낸 것? 로즈메리가 오랜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까봐, 상대방도 충격으로 인해 쓰러질까봐 그랬을 뿐이다. 그녀가 이미 타계했다는 그 무서운 사실을, 단 1도 접점이 없던 사람이 얘기하는 것이 과연 쉬울까? 의사들도 병상에서 환자의 사망 시각을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은데 말이다.
길다가 살인과 관련된 단어를 검색한 것은? 혹시나 그레이스가 교회 사람들로부터 살해당했을까봐,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다. 탐정들도 사건을 추리하고 풀려면 살인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럼 탐정 모두가 살인자이겠는가. 동성애자가 교회에 취직한 것?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말 하지 못 하는 답답한 성격 때문일 뿐이다. 내리 마음 속에 죄책감을 동반하면서 일을 하러 나온 사람이다.
길다는 이후 로즈메리를 만나게 된다. 자신을 속였다고 로즈메리에게 혼날 줄 알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고마움을 표했다. “제가 미쳐서 잘 대해주는 건가요?” 본인 나름대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길다의 소심한 행보를, 로즈메리만이 알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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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길다는 기르던 토끼였던 플롭을 부모님이 땅에 묻어주는 걸 보면서, ‘죽음’이란 것을 처음 겪었다. 비단 동물 뿐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역시 우주에서 보았을 때 한 점의 먼지 밖에 되지 않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종국엔 죽음을 맞이하게 될 필멸자라는 것. 다소 어린 나이에 삶의 진리를 깨우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 그렇게 과소평가 하는 주제에, 타인의 삶은 너무나도 귀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레이스의 죽음으로 인해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머니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알콜 의존증으로 인해 동생이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걱정돼서, 분명 좋아하고 있으면서 표현을 잘 못하는 바람에 여자친구에게 미안해서, 무신론자면서 교회에 취직해 일을 하는 게 관계자들에게 왠지 죄송해서.
길다는 나라는 하찮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고 폐 끼치기 싫은 사람일 뿐이다. 동시에 솔직하게 이야기 할 자신은 없는 겁쟁이이고 말이다.
내 인생이 지극히 사소한, 먼지 한 톨에 불과하다는 걸 받아들이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내 동생의 인생이 대수롭지 않다거나, 할머니들이 죽는 게 별일 아니라거나, 토끼나 고양이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나에 대해서는 극도로 하찮게 느끼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매 순간 절실히 자각하고 있다.
과거에 나 역시도 자기혐오의 끝판왕에 달리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미워하고, 누군가의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계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억지로 까내리는 것 같았다.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왜 나 같은 걸 좋아해?”라는 바보같은 질문을 자주 했었다. 때로는 본가 13층에서 떨어지면 가족들이 드디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속도 함께 시원해질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삶을 부정하게 된 건 과거에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이 많았기 때문이겠지만, 나 역시 길다처럼 우리 인간이란 우주에서 보면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심지어 원자나 나노보다도 더 작은 단위일 거라는 생각도 한 몫 했다. 나를 아는 사람보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데, 하물며 인간은 결국 죽게 될텐데. 이 때,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유한이라는 한계를 가진 삶에서 최대한의 행복과 이득을 발견해내고자 노력하지만, 나는 반대의 행보를 걸었다. 그런 주제에 타인에게 속하지 못 한다는 사실에 우울감도 조금은 느꼈던 것 같다.
그렇지만서도, 내가 했던 생각-인간은 먼지네, 죽네 마네 등등-을 다른 사람도 했다는 사실은 퍽 안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틀렸다고, 잘못되었다고 말하겠지만, 한 명 정도는 나랑 비슷하고 내 편일 수도 있겠다는 이상한 위로를 받게 된다. 꼭 알아주었으면 했던 건 아니지만, 소심하게 벌인 작은 행동을 누군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준다면, 꽤 많이 기쁘지 아니할까 싶다.
길다는 며칠 후, 이웃집 주민이 오래 전부터 찾고 있던 고양이를 이웃집이 아닌, 자신의 집 현관 아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작은 삶의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