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변환]KakaoTalk_20250703_205854695_08.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04194940_rlmmmzhr.jpg)
작년 초, 크리스터퍼 놀란 감독이 최근 가장 좋았던 영화에 <애프터썬>이라는 낯선 작품의 이름을 꼽은 것을 발견했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추천한다니, 달리 따질 것 없이 바로 영화를 틀었다. 더 이상의 아무런 검색 없이.
우울, 침잠
영화는 우울에 대하여 말한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뒤로하고 자살로 끝맺기까지의 과정을 아직 인생이 서툴고 힘겨운 30대의 캘럼과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소녀 소피. 두 부녀의 여름휴가를 통해 섬세히 담아내었다.
마지막 여름휴가
캘럼은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와 떨어져 산다.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떠나 런던에서 살아가며, 얼마 전에는 직장까지 잃었다. 그는 이제껏 모은 돈을 전부 털어, 딸과 튀르키예로 여름휴가를 온다. 그는 애초부터 이 여행을 마지막 여행으로 계획한 것이다. 후에 결국 아버지를 잃은 소피는 그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을 반추해 볼 것이다.
어디서 그의 우울이 내비치었는지, 혹시 그가 언뜻 도움의 신호를 보내지는 않았었는지, 하나하나 되짚어나갔을 것이다.
그런 소피를 예상했다는 듯, 영화는 소피가 여행 도중 촬영했던 아버지와의 캠코더 영상으로 시작한다. 소피는 다시 영상들을 돌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무언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러나 캠코더에 기록된 영상은 고작 서너 개의 짧은 영상들뿐.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여행 동안의 모습들은 대부분 소피가 기억의 흔적을 되짚고, 또 상상을 해보며 펼쳐지는 장면들이다.
남겨진 이가 기억과 상상을 혼재시켜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 속 누군가와의 마지막 이야기가 관객 앞에 펼쳐진다.
불안한 전조
![[크기변환]KakaoTalk_20250703_205854695_2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04210509_smaedvax.jpg)
영화에서는 아슬아슬한 캘럼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매우 잔잔히 흘러가는 영화임에도 중간중간 그러한 장면들이 관객의 긴장을 유발한다. 특별한 검색 없이 틀었기에 단순히 가족영화, 혹은 여름휴가를 아련히 담아낸 예술영화 정도로 생각했던 나와 같은 사람들도 이제는 점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분명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카펫을 축 처진 몸으로 구매하는가 하면, 난간에 두 팔과 다리를 펼치고 위태롭게 서 있기도 하고, 바다에 들어가서는 오랜 시간 나오지 않기도 한다. 심지어는 소피가 주위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를 부탁하여, 많은 이들에게 깜짝 생일 축하 서프라이즈를 받는 기뻐해야 마땅할 순간에도 캘럼은 웃고 있지 않다. 그 후에 홀로 방으로 돌아온 그는 꾹꾹 억눌러온 눈물을 터트린다.
이 외에도 여러 장면에서 그의 심리 상태가 이미 심각한 정도임을 예측할 수 있다. 영화는 절대 직접적으로 '캘럼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라고 명시해 주지 않는다. 그저 우리도 소피와 함께 알듯 말듯, 숨죽여 주시하게 만든다.
완벽한 최악의 엔딩
![[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50703_205721433_0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04205521_bqazcbim.jpg)
여행의 마지막 밤, 호텔에서는 파티가 한창이다. 캘럼은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인다. 음악에 몸이 이끌리는 대로 신나게 춤을 추는 캘럼의 모습. 그는 함께 춤추자며 소피를 이끈다. 그때 흐르는 음악은 Queen의 Under pressure. Under pressure는 '정신적 압박'을 의미한다.
통통 튀는 듯한 신나는 반주에 보컬은 이따금 절규하는 듯한 음성을 내지른다. 기이함, 아련함, 절규와 환희가 한 데 뒤섞인 듯한 음악과 그와 비슷하게 기쁨에 취한 것인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캘럼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진다. 소피를 꼭 안고 춤을 추는 캘럼.
그리고 귀에 분명히 들어오는 가사들.
Can't we give ourselves one more chance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는 없는 걸까
Why can't we give love that one more chance 왜 우리는 사랑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 없는 걸까
... This is our last dance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춤
This is ourselves 이게 바로 우리야.
![[크기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50703_20585469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04210016_kumizakb.jpg)
결국 짧았던 여행이 끝나고, 공항에서 캘럼은 마지막으로 소피를 배웅한다. 소피를 보낸 뒤 뒤돌아서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 캘럼의 뒷모습이 보인다. 문을 열자, 그곳은 아주 새까맣다. 왜인지 보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결국 캘럼은 문밖으로 나가고, 문은 굳게 닫힌다.
화면은 어른이 된 소피가 자신의 생일날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영상들을 틀어보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완벽한 최악의 엔딩이다.
인생의 유효기간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잠식해 오는 우울. 우울은 소멸을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 모든 것에는 소멸을 말하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캘럼 또한 우울이 극에 다했을 때 소멸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지 않았을까? 누구나 겪을 소멸인데, 누군가가 먼저 사라지기로 결심하는 일은 어쩌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냉동 보관하지 못해 유통기한이 짧아진 음식처럼. 그냥 그렇게 버려질 수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중경삼림>을 아는가? 중경삼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물건이든 기한이 있다. 정어리도 기한이 있고, 간장도 기한이 있고, 랩조차도 기한이 있다. 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유효기간이 없는 것은 없는 걸까?"
언젠가 확실히 다가올 인생의 유효기간. 죽음을 본인의 선택으로 앞당기는 것은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캘럼의 뒷모습을 붙잡고 싶었을까. 왜 그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생을 살고 있었음에도 계속해서 살아갔으면- 하고 바랐을까. 인생은 허무한 데다 고통스럽기까지 한데 말이다. 우울에 몸부림치며 자살을 결심하는 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붙잡을 수 있을까.
당신은 무얼 위해 살아가나요?
![[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50703_205854695_1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04210117_zbpizdyn.jpg)
나는 캘럼이 어째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 소피가 그랬듯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인생이 망한 것 같다, 인생에 실패한 것 같다'라는 느낌 때문임은 예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한 우울의 이유가 되는 사건보다, 결과적으로 특정한 느낌의 우울을 느낀다는 것에 집중하게 되자, "11살의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라고 캘럼에게 묻던 소피의 모습이 떠오른다.
질문을 들은 그 순간 캘럼은 무슨 기분이었을까.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크고 높은 꿈을 꾼다. 자신을 의심하지도 않고, 세상을 다 품을 듯한 포부를 자랑스럽게 내뱉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린 시절 꿈꿨던 어른의 나이가 되고 나면 깨닫는다. 그 근사했던 상상 속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나이만 어른이 되었음을. 냉담한 현실에 꿈은 점점 작아지고 낮아진다. 그렇게 날려 보낸 꿈들은 수두룩하다.
어른이 된 꼬마들은 실망해 간다. 처음에는 세상에, 나중에는 자신에게. 캘럼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내 탓 같고, 내가 못난 것 같고...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압박을 주다 바스러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다 커버린 아이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그런 이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너는 무얼 위해 사느냐고. 인생을 사는 이유. 그게 무어냐고.
이때, 과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의 옳고도 옳은 말씀은 사절이다. 삶에는 의미가 없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안다. 종국에는 그러한 시도부터가 비약인 것도 안다. 나는 그래서 오랫동안 답을 몰라 헤맸었다. 저 3가지 분야의 책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게 다 결국 내 답은 아닌 것 같았기에.
그러다 애초에 문제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의 성립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데에 몰두한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늘 도돌이표처럼 돌아오기에, 답이 없는 질문에 과도히 매몰되는 것이었다.
삶은 참/거짓 게임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저 주관식으로 그 질문에 바로 답해보면 된다. 내가 사는 이유. 그 수많은 실패, 좌절, 우울을 딛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이유. 그 답은 '소유하기 위한 삶이 아닌 존재 그 자체를 위한 삶'이었다.
나는 세상을 자꾸만 무언가를 성취해 낼 대상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세상은 그저 내 인생의 배경일 뿐인데도.
세상에는 현재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수많은 격언이 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이고 오늘은 선물이다.'와 같이 현재를 살도록 동기부여 하는 말들. 분명 너무 좋은 말인데, 그래서 그 현재를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는 여전히 답해주지 않는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은데 어떻게 현재를 살라는 건지 모르겠네. 말이 쉽지.'와 같은 볼멘소리만 나오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니 문제는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현재에 만족하라는 것은, '존재 자체'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든다면 소유하지 못한 현재는 곧 불행이겠지만, 세상이 스스로에게 그저 삶의 배경일 뿐이라면 소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금 살아 숨 쉬는 바로 이 순간의 내 인생,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우울의 보편성
'우울'은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드는, 밀물처럼 밀려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여러 감정 중 하나이다. 당신이 만약 우울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아주 부드럽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파란색 우울, 그 짙은 바다에 빠질 때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당신에게 들려줄 것이다.
Can't we give ourselves one more chance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는 없는 걸까
Why can't we give love that one more chance 왜 우리는 사랑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 없는 걸까
당신은 노랫말을 향해, 껴안은 캘럼과 소피를 향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외쳐보자. 힘차고 큰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사랑에게 한 번 더 기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