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전시, 연주회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친구 중에 드라마광인 친구와 만나면 항상 서로를 신기해한다. 어떻게 저러지? 어떻게 이러지? 그 친구와 서로의 취미가 너무나 다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는 문득, 내가 무엇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뮤지컬, 전시나 연주회는 모두 ‘직접’ 가서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본다. 화면 속 세계가 아닌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나는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현장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오히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진짜로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걸 느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일이다. 익숙해진 디지털 환경은 현실의 감각을 쉽게 휘발시킨다. 핸드폰으로, 유튜브로, 인스타그램으로 무엇이든 보는 것이 습관이 되다보니, 진짜를 마주하고도 그 진짜가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미술 작품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을 실제로 마주하면, 처음엔 믿기지 않는다. ‘정말 이게 그 작품 맞아?’ 그럴 때는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직접 발을 움직여서 작품 모서리에서 모서리까지 가보기도 하고, 실제로 작품을 마주할 때만 볼 수 있는 붓터치를 관찰하고 있으면 내 눈 앞에 이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면서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한다. 미묘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우리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러한 특별한 경험을 하기 가장 좋은 존재일 것이다.
물방울. 너무나 흔하고 가볍고 빠르게 증발해버리는 그것이 어쩌다 이토록 무게감을 얻게 되었을까. 김창열은 ‘물방울 작가’라는 수식어로 불릴 정도로, 인생의 대부분을 오직 하나의 이미지에 헌신했다. 물방울은 그에게 사물의 재현을 넘어, 존재와 무의 미묘한 경계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평생을 통과한 수행의 언어였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었다. 전후 시대의 폭력성과 허무를 체험한 세대였던 그는, 뉴욕에서 앵포르멜과 옵아트 등 당대의 새로운 예술에 노출되며 조형적 실험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예술은 단순한 양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표현의 최전선에서 그는 오히려 ‘사라짐’의 미학에 천착했다. 1972년부터 물방울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모든 것을 덮는 추상이나 개념의 장벽 너머로 ‘침묵’처럼 내려앉는 존재 하나를 그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극사실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술의 과시가 아니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그러나 결코 손에 닿지 않는 그 ‘진짜 같은 것’은 도리어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이 물방울은 진짜일까? 화면 위에 놓인 것인가, 안에서 솟아오른 것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는 이 질문을 던지고, 우리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애매한 틈 사이에서 무언가가 ‘열리도록’ 한다.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ego)’의 신장을 바라고 있으나,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김창열은 물방울의 본질이 곧 ‘무(無)’이며, 결국 에고의 소멸까지 의도하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세계에 대한 욕망에 있다고 말한다. 즉 물방울이란 것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물방울이지만, 그와 동시에 김창열의 작품세계가 담긴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김창열이 그린 물방울은 그린다는 행위에 집중했을 때는 존재하는 실재의 것이지만, 창조자가 담은 뜻은 ‘무(無)’라는 점에서 오묘한 경계에 서있다.
그가 자주 사용한 바탕은 천자문, 신문지, 백색 캔버스였다. 배경은 마치 사라지거나 증발된 어떤 문맥의 잔해처럼 보인다. 그 위에 물방울이 놓인다. 가끔은 몇 방울, 가끔은 화면 전체를 적시는 수십 개의 물방울.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그림자, 굴절, 맺힌 가장자리의 명암이 다르다. 마치 같은 시간에 머물 수 없는 존재들이 하나의 순간 안에 포착된 듯하다. 그 안에는 ‘존재하지만 머무를 수 없는 것’의 애틋함이 있다.
일본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김창열에 대해 “환상과 사실이라는 두 세계를 조화롭게 겹쳐놓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단지 회화적 수법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의 물방울은 실재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물리적이면서도 정신적이다. 현실에서 가져온 사물이면서, 환상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다. 우리는 그의 물방울 앞에 서서, 자신이 믿고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된다. 동시에 그 의심이야말로, 진짜 감각의 출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머물던 제주도에는 이제 ‘김창열미술관’이 세워져 있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그 땅에서, 투명한 물방울은 바람, 안개, 이슬, 그리고 그림자 속에 섞여 있다. 그의 그림은 거기에 그대로 어울린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 또한 “제주는 물, 바람, 돌이 어우러진 명상의 공간”이라 말하며 이곳에 자신의 예술을 맡겼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찬미이자,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리기의 반복 속에서 무(無)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어쩌면 이토록 아름답고도 강한 이미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삶 전체를 통해 물방울과 대화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이란 결국 우리가 얼마나 진심으로 한 가지를 응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면, 김창열은 가장 깊은 응시의 화가였다.
그러니 한 번쯤 그 앞에 서보자. 더 이상 클릭하거나 넘기지 말고, 멈춰 서서 들여다보자. 투명하게 맺힌 작은 존재 하나가, 어쩌면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던 질문을 반사해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