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에디터로서 활동한지 어느덧 4개월, 총 18편의 기고문으로 나의 생각과 경험을 세상에 드러냈다. [Project 당신] 시리즈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매주 1회의 글을 정기적으로 올리는 활동에는 다양한 여정이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한 크고 작은 도전, 글감 사냥을 위해 사소한 것들도 ‘문화예술’로 바라보며 사유했던 시간들, 에디터 활동을 위해 1주일 단위로 일정을 계획했던 시간 감각. 시간이 흘러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활동’으로 기억될 2025년 나의 봄과 초여름에는 새로운 일상이 있었다.


소통의 의미를 찾는 것은 에디터 활동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큰 과제였다. 에디터 활동을 하게 되면, 활동 지침 안내나 문화초대 등이 담긴 대표님의 공지 메일을 종종 받게 된다. 메일에는 기본적인 안내 사항과 함께 서두나 말미에 자주 등장하는 안부인사가 있다. 메일을 받는 에디터들이 아트인사이트에서 자신만의 소통을 이루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 안부인사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소통’이라면 상호 간에 오고가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글을 누군가가 읽는 과정에는 가는 것은 있지만 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딱 한번, 기고문을 계기로 개인적인 연락을 주신 분이 계셨지만, 어떤 분들이 나의 글을 읽는지, 내 글이 무엇 때문에 많이 본 게시글에 올라가는지, 다른 사람들은 내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부분 알 수 없는 채로 지나간다. 그래서 아트인사이트에서 이루는 소통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에디터 활동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졌다.


돌이켜보니, 내가 에디터 활동을 통해 이어온 여정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소통의 과정이 있었다. 에디터인 나의 입장에서, 글을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결정권’의 맥락으로 되짚어보며 내 에디터 활동의 마지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에디터의 결정권, 무엇을 보여줄것인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는 매주 찾아오는 고민이었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외활동이나 개인적인 작업을 위해 주기적으로 콘텐츠를 올려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무엇을’과 ‘어떻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그 또한 소통의 과정 중 하나였다.


가령 내가 다가오는 2025 프리즈 서울을 방문하고 기고문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이미 아트인사이트의 ‘리뷰’ 카테고리에서 다른 에디터님들이 보여주었듯, 같은 행사라도 주목하고자 하는 내용은 서로 다를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부스들을 추천하거나 가이드 투어 참여 후기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개관할 ‘프리즈 하우스’를 함께 방문하여 지난 해와 달라진 새로운 시도를 조명할 수도 있겠다. 입점한 F&B나 스폰서 브랜드를 바탕으로 타겟층이나 경영전략을 분석하는 글도 재미있을 것이다.


에디터의 책임은 글감을 정한 이후에도 이어진다. 어떤 사진을 커버와 본문에 삽입할지, 어느 위치에 넣어야 글을 읽는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 부연설명과 왜래어의 원문 표기는 어느 정도 추가할지.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모든 시각적, 언어적 요소에는 에디터의 판단과 결정이 관여한다. 때로는 ‘담지 않는 것’도 그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을 고민하는 목적지에는 아트인사이트라는 플랫폼을 통해 만나게 될 저 너머의 누군가가 있다.


미디어와 저널리즘 업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조율하는 권한을 지닌 이들을 ‘게이트키퍼(Gatekeeper)’라고 칭한다. 다만, 이 표현은 대중들에게 유통할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검열하여 여론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뉘앙스가 강하다. 사실 대부분의 콘텐츠에는 대상에 대한 작성자의 관점이 반영되기에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을 공개된 공간에서 나누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러한 권력이 주어진다.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에디터와 컬쳐리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4개월 간 ‘에디터’의 권한을 통해 이어온 결정의 목적지는 통제보다는 ‘다가가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나의 결정권은 권력행사보다는 소통을 위한 책임감에 더 가까웠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상대방의 관심사를 고려하고 한 단어, 한 마디에 배려와 정성을 들여 말을 건네듯, 나는 나의 글을 매주 다듬어왔다. 그렇게 나의 기고문은 소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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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시각적 요소를 더하기 위해 아무 사진이나 넣어보았다. 시각적 재미를 가미하기 위해 이미지를 넣는 행위 또한 독자를 고려한 결정이 될 수 있다. 

출처: 직접 촬영




독자의 결정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독자의 피드백을 알 수 없으니 소통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나의 입장만을 고려한 전제였다. 독자, 혹은 청중들은 저마다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다양한 플랫폼에 떠도는 목소리들을 맞이한다.


나는 유튜브나 소셜미디어에 댓글을 거의 달지 않는다.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수줍기도 하고, 특정 단어나 표현에 꼬투리를 잡혀 시비가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보니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 기능을 통해 믿을만한 지인들에게만 나의 감상을 나누는 편이다. 유달리 인상적이었거나 다음이 기대되는 콘텐츠에는 ‘북마크’나 ‘구독’을 한다. 이는 내가 그들의 관점이나 생각이 담긴 무언가를 보고 감정이 동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했다는 점에서 분명 반응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반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글의 정보가 의심되는 경우 직접 조사하여 팩트체크를 하기도 한다. 때로 나와 다른 의견을 접하면 그것에 대한 반박을 스스로 사유해보거나 나의 관점을 넓힌다. 상대방이 나에게 말을 걸면, 나 또한 대답을 건네거나, 비언어적 반응을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듯, 나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누군가의 다가옴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이 동조인지 반대인지 성찰인지는 나의 사유와 결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고문이 아트인사이트에 출력된 시점부터, 소통의 장은 마련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나의 글이 헤드라인에 올라가거나 많이 본 게시글에 등록되는 것으로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어딘가에서도 한 명의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고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나에게 보이지 않을 뿐 소통은 성립된다.




사유하는 이들의 책임감


 

아트인사이트에서 이어 온 4개월 간의 에디터 활동은 나에게 소통의 의미를 확장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는 단순히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누군가를 맞이하는 방식을 ‘글쓰기’로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에디터’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행동들은 내가 청중으로서, 맞이하는 사람으로서 반응한 언어적, 비언어적 결정들도 소통이었다는 것 또한 깨닫게 해주었다.


소통의 의미를 확장하며 나의 사유에 따른 결정에 다시 한 번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공유한 사소한 생각이 누군가의 관점이나 의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조명하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에디터가 아니더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로서 언제나 그 책임을 지닐 것이다. 이는 반응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사소한 동조가 어떤 목소리를 강화하는지, 비판없이 무분별하게 정보를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결정권이 있다. 그리고 나의 결정은 ‘소통’이라는 방식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에 주목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감추는가?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는가? 우리는 무엇과 연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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