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400년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접하는 소중한 기회”
이번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특별전: Monet to Warhol’을 설명하는 광고 문구 중 하나다. 다양한 전시를 접해 봤지만 특정 시대나 사조(르네상스, 인상주의, 현대미술 등), 특정 작가를 주제로 한 전시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400년이라는 흐름을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를 설립한 플로렌스 필립스 부인은 고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국제적 수준의 공공 미술관이 있기를 희망했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공공 근현대 미술 컬렉션인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컬렉션’은 그렇게 탄생했다.
본 전시는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에서 시작해 빅토리아 시대, 인상주의를 넘어 20세기 컨템포러리 아트,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시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다음은 각 섹션별로 인상 깊었던 작품 위주의 감상이다.
1)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 -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다니엘 세이거스의 [꽃병에 꽂힌 꽃](하단 그림)이었다. 사진처럼 세밀하면서도 그림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터치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흔히 보이는 상징물을 통한 은유 없이 꽃의 아름다움과 생명력만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2)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미술 - 이 섹션에서는 중세 고딕 및 초기 르네상스로 돌아가려는 미술운동을 일컫는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그림을 처음 만나보게 되었다. 로세티의 [레지나 코르디움](하단 그림)에서는 바티칸 성화의 고풍스러운 느낌과 현대 클림트의 화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면적인 구도에서 입체적인 색감과 양감이 느껴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로렌스 알마타데마의 [장남의 죽음]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의 구도, 어두운 황금빛 색채, 그림 곳곳의 섬세한 디테일이 과거 사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맥닐 휘슬러의 [석회 굽는 사람]은 화려하지 않은 선화임에도 완벽하게 배치된 형태의 구도가 돋보이는 그림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3) 인상주의 이전: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 혁명으로 - 이 섹션에서는 모네의 스승으로 알려진 요한 용킨트와 외젠 부댕의 작품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 두 작가가 각각 순간에 존재하는 빛과 색채를 빚어내는 방식을 보며 모네 화풍의 토대가 무엇이었는지 엿볼 수 있었고, 동시에 모네의 작품에서도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하단 그림은 외젠 부댕의 [트루빌 항구]다.
4)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 이 섹션에서는 드가와 모네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전시의 무게감을 더하는 느낌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모네의 그림 역시 만족스러웠지만, 특히 드가의 [두 명의 무희들]은 왼쪽 발레리나의 일부를 시야에서 제외하는 독창적인 구도가 그림에 나타난 순간을 더 사실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이게 하여 흥미로웠다.
5) 인상주의 이후 - 폴 시냐크, 툴루즈 로트렉, 로댕, 뭉크 등 다양한 작가들의 화풍을 만날 수 있는 섹션이었다. 폴 시냐크의 [라로셀](하단 그림)은 큰 점묘화가 선사하는 압도감과 더불어 점으로 표현된 다채로운 빛과 색채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림에 포착되는 순간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아름답게 드러났고, 이를 통해 미술사의 끊임없는 변화와 실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폴 고갱, 툴루즈 로트렉 등 보다 자유로운 느낌의 작품들을 보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를 거쳐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6)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 새로움과 혁신을 추구하는 예술 운동으로서 과감하고 감성적인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야수파, 더 나아가 형태와 색채를 왜곡하고 과장한 큐비즘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의 토대를 확인할 수 있는 섹션이었다. 피카소의 [어릿광대의 두상]은 익숙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형태를 왜곡하는 것을 넘어 아예 형태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과 순수함이 느껴져 피카소의 특징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했다.
7) 20세기 컨템포러리 아트 -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을 지나 대중문화적 시각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 속에 수용한 팝아트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섹션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남자의 초상에 관한 연구]는 이것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형되고 '부식된' 형상이 특징이었는데, 피카소의 작품에서 '신기하다' 정도의 감상을 느꼈다면 유사한 형태의 이 작품에서는 정서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작가의 내면에 대한 표현이 강렬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8) 20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예술 현장 - 남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주요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이름에 걸맞게, 생소했던 아프리카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섹션이었다. 제라드 세코토의 [오렌지와 소녀]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연상되는 강렬한 인상에 특유의 쨍한 색채, 독창적인 구도가 합쳐져 신선함을 선사했다. 조지 펨바의 [죄송해요, 부인]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흑인이 겪은 비극을 그림을 통해 고발한 작품으로, 지식으로만 알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를, 감정적으로도 마주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다소 생소하지만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던 이들의 작품과,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갖춰진 남아프리카공화국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전시 소개에서 언급했듯이 단순히 유명 작품을 일별하는 것을 넘어, 미술이 시간을 넘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온전히 감상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인상주의, 큐비즘, 팝아트 등 다양한 사조는 각각 그 자체로도 완결된 감상의 대상이지만, 그 사이의 흐름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또 다른 가치를 선사하는 경험이었다. 단순한 작품 하나하나가 아닌, 마치 글을 읽을 때 행간을 중요시하듯 그림의 사이사이에 있었을 법한 시간을 실감하게 되는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