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건 늘 그래.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럴 때 무심하게 찾아와 모든 걸 바꿔놔.’ (<어쩌면 해피엔딩> ‘First Time in Love’)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2025년 6월 8일(미국 현지 시각),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제78회 토니상에서 6관왕을 차지했다. 작품상·극본상·음악상·연출상·남우주연상·무대 디자인상을 거머쥔 <어쩌면 해피엔딩>(영문 제목 ‘Maybe Happy Ending’)은 한국인 최초(극본상과 음악상을 받은 박천휴 작가) 토니상 수상이란 영광도 누렸다. 대한민국 공연계, 나아가 문화계에 영원히 기록될 놀라운 쾌거다. 하지만 한편으론 예상했던 놀라움이기도 하다. 2015년 트라이아웃, 2016년 초연부터 높은 작품성으로 호평받은 <어쩌면 해피엔딩>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사랑받을 이유가 뚜렷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까운 미래, 헬퍼봇 아파트에 사는 두 헬퍼봇이 사랑하는 이야기다. 극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줄거리,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 로봇이 주인공이어도 지극히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냈다. 즉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지만, 감정과 메시지는 여러 번 곱씹으며 오랫동안 여운을 간직하게 되는 작품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2024년 11월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후 현지에서 ‘반딧불이들’이란 팬덤을 형성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버전처럼 서울과 제주가 배경인 브로드웨이 버전은 남자 주인공 올리버의 친구이자 극 중 중요한 소품인 ‘화분’을 한국어 그대로 사용한다. 이처럼 브로드웨이 관객에겐 다소 낯설 수도 있는 한국 색이 있음에도, 극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강력한 보편성을 가졌다. 그 보편성은 ‘사랑’이다.
흔히 사랑이라 하면 이성애자의 연애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남성 헬퍼봇인 올리버와 여성 헬퍼봇인 클레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어쩌면 해피엔딩> 또한 얼핏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극에선 올리버가 전 주인인 제임스를 찾는 과정, 그에 얽힌 비밀 또한 이야기의 중요한 축이다. 올리버가 제임스를 기다리다 그를 만나러 가는 건 반려동물이 잃어버린 주인을, 또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걸 연상시킨다. 올리버의 사랑은 그리움과 헌신이며, 제임스의 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은 내리사랑이었다.
성소수자(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의 정체성과 자아 찾기, 사랑 이야기 또한 연극·뮤지컬에서 자주 등장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약 많던 과거를 살던 성소수자의 감정과 사랑은 더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들 혹은 그들은 서로만 알아볼 수 있는 신호로 몰래 사랑을 전했다. 조심스럽고, 무섭고, 때론 감정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혼란스럽지만, 힘겹고 절실하게 꺼낸 애틋한 감정은 당연히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슬픔과 같은 말 -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들을 수리할 부품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는 헬퍼봇 아파트에 사는 이웃인 그들은 사실상 버려진 처지다. 주인 없인 일정 거리 이상 못 움직이는 규칙이 있지만, 그들은 금기를 깬다. 올리버의 전 주인이자 친구인 제임스를 찾기 위해서다. 제임스가 사는 제주도까지의 여행을 함께하는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겠다 약속한다. 하지만 금기는 또다시 깨진다. 클레어와 올리버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다며, 이젠 어떡하냐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아이가 세상을 처음 만날 때처럼, 사랑에 빠지며 일어나는 자신들의 변화를 마음껏 누리며 신기해한다. 그렇지만 몸은 계속 낡아가고, 고칠 방법은 없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간다. 여기서 올리버와 클레어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활발하고 용감한 클레어는 사랑한 기억을 지우자 한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살던 내향적인 올리버는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그에겐 자신이 죽어가는 것보다 클레어를 잃는 게 더 두렵다. 그렇게 올리버는 안전 구역(헬퍼봇 아파트·클레어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을 또 벗어나며 마지막 금기를 깬다. 그 금기는 슬픔에 맞서는 것, 반드시 찾아올 이별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올리버는 예견된 슬픔을, 클레어를 선택하며 또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녀의 손길은 냉정하지 않아, 어쩌면 나와 같지 않을까 - 뮤지컬 <접변>
<접변>은 1939년 중국 상해를 배경으로 한 여성 서사 뮤지컬이다. 극은 한국 관객에겐 낯선 중국 라이센스 작품이다. 그럼에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밀한 서스펜스·첩보 서사, 섬세하고 깊은 로맨스 감정선, 이국적인 음악, 일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란 소재로 한국 관객에게 익숙하게 다가가며 탄탄한 작품성을 증명했다. 202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대학로에서 초연된 극은,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만으로 입소문을 타며 매진을 기록했다.
문군과 만만은 진 선생의 여자다. 문군은 진 선생의 둘째 부인이며, 만만은 진 선생의 애인이다. 호화 여객선에서 진 선생을 만나 우원로 별장에 들어온 자유로운 만만은, 엄격하고 청빈한 문군과 충돌한다. 만만은 진 선생을 이용하려 별장에 입성했다. 문군은 독립운동을 돕는다. 한집에 살지만 이토록 다른 그녀들은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간다.
문군과 만만은 함께 왈츠를 춘다. 두 사람은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 또한 명확히 이름 붙일 수 없는 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느낀다. 그건 한 남자의 여자들이란 씁쓸한 동질감, 같은 나라·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삶의 아픔을 견뎌냈단 연대 의식, 불안한 매일을 살며 서로에게 의지하는 마음, 우정·존경·이해·연민·인류애·애정이 뒤엉킨 기묘한 감각이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가 같은 마음인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마음이 닿은 건 찰나일 뿐이다. 독립운동을 위한 작전에서 만만이 희생될 위기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만만을 지키기 위한 결단을 내리는 문군은, 그녀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보낸다. 두 사람이 추던 왈츠 스텝의 모스 부호다. 문군이 만만에게 보낸 마지막 모스 부호이자,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애틋한 감정의 이름은 ‘LOVE’였다.
우린 사랑을 했어, 그리고 그건 진짜였어 - 연극 <벤트>
<벤트>는 미국 극작가 마틴 셔먼의 작품이다. Bent는 ‘구부러진, 휜, 정직하지 못한’을 뜻하며 동성애자를 일컫는 속어이기도 하다. 극은 1934년 독일 나치의 동성애자 탄압이 본격화된 시기의 비극을 보여준다. 전반부는 주인공 맥스와 애인 루디가 게슈타포에 체포돼 수용소에 끌려가다 루디가 살해당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후반부는 수용소행 기차에서 만난 간호사 홀스트와 맥스의 수용소 생활, 사랑을 그린다. 2019년 제40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이었던 <벤트>는, 영국 국립극장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연극 100편 중 한 작품이다. 1997년 동명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수용소에 갇힌 맥스는 게이인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유대인을 뜻하는 노란색 별을 받는다. ‘핑크 트라이앵글’을 단 동성애자보다 유대인 대우가 더 낫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재회하는 맥스와 홀스트는 같은 채석장에서 일한다. 하는 거라곤 이쪽의 돌을 저쪽으로, 저쪽의 돌을 이쪽으로 옮기는 영혼을 죽이는 노동, 시지프스의 형벌뿐이다. 채석장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보다 더 삼엄한 건 그들을 감시하는 나치의 눈이다.
그럼에도 맥스와 홀스트는 서로를 의지한다. 그들은 돌을 나르며 서로를 스치던 여러 순간에서 마음을 위안받고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의미 없는 노동 후 주어진 몇 분간의 짧은 휴식 시간에서 살아있는 의미를 찾는다. 떨어져 선 그들은 서로를 만지기는커녕 쳐다보지도 못한 채 목소리와 상상만으로 서로를 욕망하며 관계를 맺는다. 상상을 사랑의 수단으로 택한 그들의 신체와 움직임은 제한적이지만, 서로를 갈구하는 처절한 본능만큼은 한계가 없다.
나치는 포로들을 장난감 취급했다. 나치 장교는 홀스트를 그 장난감으로 택한다. 채석장을 둘러싼 고압 전류 철조망에 모자를 던진 후, 모자를 주워 오란 명령을 받는 홀스트. 거부하고 반항해도 죽고, 철조망에 걸린 모자에 손을 대도 죽는 100% 확률의 게임이다. 모자를 주우러 간 홀스트는 마지막으로 맥스를 바라보며,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만진다. 그건 둘만의 암호,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홀스트는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살아남기 위해 성 정체성을 부정했던 맥스는, 그제야 연인을 품에 안으며 핑크 트라이앵글이 달린 홀스트의 옷을 입는다.
<어쩌면 해피엔딩> 올리버·클레어, <접변> 문군·만만, <벤트> 맥스·홀스트 모두 생의 막바지에도 사랑하길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랑은 금지된 일이었다. 올리버와 클레어를 수리할 부품의 생산은 멈춘 지 오래다. 방에서 얌전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게 낡은 헬퍼봇들에게 주어진 암묵적인 매뉴얼이었을 것이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사회, 불안한 시국. 한 남자의 여자들로 살던 문군과 만만이, 남자가 아닌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당시 인식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성애자는 당장 죽여도 죄를 묻지 않던 히틀러의 시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못 했던 수용소에서 사랑에 빠져버린 맥스와 홀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사랑을 했을까. 이 질문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첫 넘버, ‘우린 왜 사랑했을까’의 가사 내용이기도 하며 극의 창작자가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올리버는 끝이 분명한 그 길을 또다시 클레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문군과 홀스트는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연인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주며 사랑을 고백했다. 문군과 홀스트의 고백은 유언이 됐고, 수리 없이 낡아가야 하는 올리버와 클레어의 미래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끝이 다다랐단 걸 잘 알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사랑하길 택했다. 인생은 유한하고, 유한한 삶도 단 한 번뿐이며, 누군가와 같은 온도로 마음이 맞닿는다는 건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비극인 것과 동시에 ‘어쩌면 해피엔딩’이다. 이것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사랑이란 금기를 선택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