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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선과 악의 대위법,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액트 오브 킬링' [영화]

'악의'로 향하는 인간에 대해

by 김홍일 에디터
2025.06.16 18:30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길.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출근길을 마중 나간다. 줄무늬 옷을 입은 정원사는 아침부터 비료를 나르고 있다. 정원은 초록빛이 가득하고, 아버지의 옷은 정갈한 회색빛이다. 아버지의 생일이 찾아오면,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찾아온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높으신 분이다. 생일을 축하하며, 술잔을 치켜든다. 사람들은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의 소장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지배하는 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에 관한 문제이다. ‘악의 평범성’을 그대로 옮겨 놓는 듯한 인물들의 행위들은 화면 바깥의 생존자들에게 질문을 건넨다. 사람의 일상은 과연 선한가? 악행을 가진 인간은 당시를 어떻게 회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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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다른 선율을 배치하면서, 새로운 음악이 탄생시키는 기법을 대위법이라고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가운데에 놓인 영화다. 인물의 선과 악의 가운데, 혹은 다큐멘터리와 표현주의의 중심 어딘가에 서 있는 듯하다. 현실을 최대한 숨기지만, 극장이라는 프레임 바깥의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자신이 만든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인물도 존재한다. 천국의 반대편은 어떨까. 기둥에서 뿜어지는 연기와 굉음은 장벽의 반대편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회색 장벽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위치를 설명한다. 치우치지 않고서, 우두커니 서 있는 벽. 벽은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시선을 통해서, 학살극의 중심에 있던 인물을 바라볼 뿐이다.

 

또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라는 지평선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자크 리베트는 영화 내의 사실주의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성취 불가능한 요소라고 말한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현실감’을 이정표 삼는다. 표현과 현실의 갈림길 사이에서 감독은 무미건조한 연출 방식을 선택한다. 포착의 영화인 다큐멘터리의 방식을 이어가지 않는 이상, 관객에서 제시한 극 중 현실은 감독에 의해 정제된 이후이다. 감독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불편함’은 관객들에게 필연적으로 오독되고 만다. 특히 유대인 강제수용소와 같은 주제에 대한 영화면, 더더욱 오독을 전제하여야만 한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장인 회츠의 일상이 사실주의적인 전통을 따랐다면, 영화 전체적으로는 표현주의적 색채 역시 드러나고 있다. 만약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영화라면, 주제가 유사하면서 연출 방식에서 비교 가능한 영화가 있다. 바로 <액트 오브 킬링>이다.


인도네시아의 학살극을 주제로 삼은 <액트 오브 킬링>은 장면 사이의 영화적 재현을 추구한다. 인물들은 과거의 자신을 연기하고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학살의 재연을 촬영한다. 학살자들이 스스로 과거를 재연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는 아이러니는 안와르 콩고의 알 수 없는 헛구역질로 마무리된다. 회트 또한 계단을 내려가면서, 알 수 없는 헛구역질에 시달린다. 감독은 헛구역질이 시작되는 시점, 아우슈비츠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배치한다. 각기 다른 두 영화이지만 모두 과거와 현재라는 대조를 통해서, 학살극이라는 주제 의식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액트 오브 킬링>의 표현 방식과는 다른  이질감이 존재한다. 현재와 과거의 대조는 <액트 오브 킬링>이 추구한 전체 구조라고 할 수 있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현재의 시간축을 삽입하면서 일으키게 만든다. 즉 <액트 오브 킬링>이 추구하는 학살극의 재연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뤄지게 된다.

 

일상에 심취한 인물들을 맞이할 때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비명이 들리곤 한다. 공기를 찢는 소리도 들린다. 관객들은 쉽게 학살에 대한 이미지를 논할 수 있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간접적인 경험만을 제공한다. 영화의 이미지를 지배하는 시각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청각에게 그 자리를 넘긴다. 다르게 말하면, 시각의 영향력이 소리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학살극을 재연하는 방식은 소리의 이미지화로부터 이뤄진다. 사운드를 회색 장벽을 사이에 두고, 평화로운 일상과 굉음을 겹친 시간대에 배치한다.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로 인한 대위법으로 이미지를 형성한다.

 

부조화는 영화의 이미지를 형성함과 동시에, 서사 내에서도 감독이 추구하는 악을 강조하기 위해 배치된다. 현재와 과거의 부조리를 통해서, 악의 존재를 부활시키는 일. 이는 <액트 오브 킬링>이 악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재와 과거의 부조화를 통해서 악의 기억을 부활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안와르 콩고의 현재는 과거에 지배 당한 이후라면, 회츠의 일상은 과거 그 자체이다. 다만 과거 그 자체를 불러 일으키는 주체는 회츠 자신이 아니다. 오히려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주체가 과거를 기억해내는 방식이다. 또한 일상의 영역에서 포착을 중시하는 다큐멘터리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추구하는 과거의 부활의 측면과는 다르다. 학살극이라는 주제는 동일하지만, 안와르 콩고의 시간축은 현재에 존재한다. 하지만 회츠라는 인물의 시간축은 여전히 과거이다. 아우슈비츠의 현재를 보여주는 몽타주 속에서도 회츠의 손아귀는 보이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회츠는 그 자체로 상징물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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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된 화면, 계단을 내려가는 회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불협화음으로 점철된 음악으로 마무리된다. 장송곡과도 같은 선율은 초반의 암전과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듯하다. 앞서 암전된 프레임 외에도 영화는 푸른 빛과 붉은 빛, 하양을 이용하여 관객들의 시선을 전환시켰다. 전환이 되는 지점마다, 관객들이 가진 느슨한 긴장감을 환기한다. 만약 영화를 반으로 잘라놓았을 때, 이러한 지점들은 도형의 꼭짓점이 되어 맞물리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의 내부는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지만, 외형은 합동으로 맺어진다. 이는 선율을 하나의 조화를 이루게 만드려는 의도성이다. 각기 다른 선과 악을 배치하고, 불협화음을 유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음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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