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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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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 쏟아진다. 평일 내내, 그리고 어제도 새벽 늦게까지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다 잠든 탓이다. 며칠 동안 또다시 의욕이 떨어지고 있었다. 최근 약속이 잦아서 집에만 오면 침대에 널브러지기 일쑤였고, 평소 자주 읽지 않았던 소설과 정치 관련 서적을 읽는 중이었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갖지 않고, 당장 나의 사적인 생활에 곧장 깨달음을 주기보다는 거시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책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굴러떨어지기 좋은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사사롭고 미시적인 영감을 크게 떠먹여 주는 에세이를 읽어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책장에서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를 집어 들었다. 2년 전 처음 읽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놀랐던 책이었다. 당시에 적지 않은 영감과 힘을 얻었으므로 지금의 내게도 분명히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에는 큰 기대 없이 책을 폈다. 함께 구매했던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 책도 처음에는 그저 재치 있기만 하고 마음을 건드는 글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두 꼭지가 넘어가기 무섭게, 나는 이보다 더 공감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이후로 무수한 밑줄을 긋게 됐다.


 

그날 나는 그 당시 나를 자기연민에 빠지게 했던 비애,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의 비애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남들이 알아봐 주길 원했다는 것이다. 나의 비애는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그 어떤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초라함이 비애의 정체였다. 나는 이것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채 눈물로 인정했다.

”나는 너무 후져.”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길 원하는 마음. 그 초라한 마음에서 오는 비애. 과거의 나는 너무나 공감한다는 마음으로 밑줄을 쳐두었다. 물론 현재의 나도 여전히 공감하고 있었다. 덧붙여 작가는 머리에 든 것 없이 앵무새처럼 남의 말이나 따라 하는 자신이 자주 과대평가되었으며, 자신도 그런 시선을 은근히 즐기며 우월감을 느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언젠가 들통이 나서 망신당하지 않을까 내심 전전긍긍했다고. 내가 자주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문장들이었다. 내 일기장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작가는 어느 날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책을 읽고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작가는 더 나은 나,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해 메모한다. 그래서 그가 메모에 관해 생각하고 느낀 점을 쓴 1부에서는 더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문장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것들을 반복해서 읽는 것만으로도 의욕이 상당히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메모와 기록의 힘을 모르는 바 아니다. 기록을 남기고 일기를 쓰면서 전과 달리 생각과 시야가 트이고, 깨달음을 얻는 경험을 여러 번 했었다. 특히 골똘히 생각하는 것보다 손으로 생각하는 게 적성에 맞는 사람이라, 매일 조금씩 나의 생각과 상태를 기록하기 위한 틀도 만들어두었다. 그렇지만 또 번번이 미루곤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는 피로와 불안에 손쉽게 짓눌려버렸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내가 고작 이거 쓴다고 내일의 내가 더 나아질까, 싶은 의심마저 고개를 들었다. 금방 잊히고 말던데.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과거에 쓴 노트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때 쓴 메모들은 현재 자신의 삶과 관련이 깊다고, 당시에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그 문장을 나도 믿어보고 싶다. 고작일 뿐인 메모가 무의식에라도 남아 현재와 미래의 내 삶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메모장 안에서 우리는 더 용감해져도 된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꿈꿔도 좋다.

 

 

마음이 흔들릴 때 “나는 꼭 이 일을 해야 해!” 중심을 잡도록 도와주는 가장 좋은 단어가 꿈이다. 공허하지 않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꿈을 따라가는 삶이다. (…) 꿈과 가장 불편한 관계를 맺는 곳이 바로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불안을 견디지 못하면 꿈이 아니라 현실에 맞춰서 삶을 만들게 된다.

 

 

책의 주제는 ‘메모’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것 중 다른 하나는 꿈을 꾸기 위한 용기였다. 결국 읽는 사람 본인의 상황에 투영해 책을 해석하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일기를 쓸 때도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내가 딱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기장에서도 은근히 움츠리고 말을 가리는 편이다. 나는 일기를 쓸 때조차 나를 가두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대부분 그렇듯이, 나도 나에게 허락된 정도로만 꿈꾸었다. 다들 그 정도가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정도. 그런데 그것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정을 유보해 왔다. 그러면서도 진짜 꿈을 꿀 용기는 없었다. 작가가 말하듯이 현실에서 그건 너무 불편하고, 사람들에게 허황되다고 비웃음을 살 것이 미리 걱정됐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말해왔다고 한다. “현실은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리고 구할 것은 구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지 받아들이기만 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삶의 모습을 만드는 것은 사랑과 꿈이지 백 퍼센트 현실은 아니라고.” 이 문장을 읽으니 SNS에서 봤던 밈 하나가 함께 떠올랐다. “저항 좀 해. 체제에 순응하려고 태어났어?” 한창 탄핵 촉구 집회가 벌어질 때 나온 문장이었지만, 꿈에 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꿈 좀 꾸자. 현실에 순응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니까. 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얼마든지 꿈을 꿔도 되겠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하게 됐다.


메모는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쓰는 것이므로 이 책은 결국 메모를 통해 어떻게 더 나은 나,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재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사람,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모종의 이유로 곧잘 시니컬해지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메모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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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오리주둥이
저는 원래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데, 공유해주신 단락들은 상당히 좋네요. 어쩌면 제 편견이 다소 과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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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9 08:57:2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