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1년 전 일이다.
일상에서 문득 스치는 기억을 되짚는 게 좋아서 한편으로는 마음 한편에 꿈틀대는 감정을 말로 다 풀어낼 자신이 없어서 나만의 언어로 간직했던 그해 여름의 이야기를 이제는 꺼내보려 한다.
2024. 06. 07
몸만 한 캐리어를 낑낑 끌며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젠간 가볼 수 있겠지라며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유럽 여행이었다. 친구들과 지나가는 말로 '야 (대학) 졸업 전에 유럽여행 한번 가보자~' 했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총 19일간의 유럽 여행이었지만 준비하는 데에는 거의 반년이 꼬박 걸린 것 같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살면서 오사카가 전부였을뿐더러 장기 여행은 아예 처음이었기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머리를 싸맸는지 모른다. 막막하기도 하고 겁도 많이 났다.
설렘보다 큰 걱정을 안고 도착한 유럽에서 마주한 세상은 생각보다, 기대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반짝거렸다.
런던, 빅벤, 런던아이, 해리포터, 킹스크로스
초등학생 때 배웠던 윤선생 영어 교재 중에 세계여행을 컨셉으로 한 시리즈가 있었다. 아직도 그 교재의 이름, 표지, 구성까지 전부 기억나는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때 교재에 실린 빅벤 사진을 보면서 나중에 크면 꼭 영국에 가봐야겠다는 어쩌면 막연하고도 무모한 꿈을 꾸곤 했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눈앞에 정말 빅벤이 펼쳐지는 그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몰려왔다.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곳에 내가 지금 와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미치도록 벅차올랐다. 그 와중에 하늘은 또 왜 이렇게 예쁜지.
몇 번을 큰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깜빡이면서 그 순간의 모든 걸 담으려 했는지 모른다. 사실 눈물도 몇 방울 흘렀다. 울지 않은 척했는데 친구한테 다 들켜버려서 머쓱하기도 했다. 한평생 처음 느껴본 감정이라 1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파리, 에펠탑, 루브르, 모네, 베르사유, 디즈니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데 출입국 도장을 찍어주시던 여자분이 나와 친구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Girls' Freedom!'이란 인사를 건네주었던 게 그때는 그렇게나 힘이 되었다.
나에게 파리는 돌아와서 더 그리워졌던 도시인 것 같다. 맥모닝을 먹으러 가는 길에 쫓아오는 노숙자를 피해 도망치다가 우산을 부숴먹었던 것도, 센강의 바토무슈에서 비에 쫄딱 젖은 채 에펠탑을 구경한 것도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인상주의 화풍을 좋아해서 오르세 미술관을 4시간이나 관람했던 것도, 사람들 틈에 낑겨서 20여 분을 기다린 끝에 마주한 모나리자가 생각보다 작아서 놀랐던 것도, 우연히 들어간 가게가 지금도 생각하면 침이 고일 만큼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파는 숨은 맛집이었던 것도, 코를 자극하는 빵의 버터 냄새와 혀끝을 맴도는 핫초콜릿의 쌉싸름함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립기만 하다.
융프라우, 인터라켄, 기차여행, 취리히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향하는 길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서 눈을 벅벅 비빌만큼 아름다웠다. 이대로 기차를 하루종일 타도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융프라우 꼭대기에 오르면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 처음엔 음? 싶었는데 눈보라에 벌벌 떨다가 먹는 뜨끈한 컵라면은 새로운 묘미였다. 날씨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곳이라 안개 사이로 드러난 산봉우리를 담으려고 카메라를 드는 순간 다시 사라지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렇지만 맨눈으로 담았기에 아쉬움은 없다.
여름 스위스의 매력은 눈 덮인 설산과 푸릇푸릇한 들판과 들꽃들의 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새하얀 겨울과 청량한 여름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듯한 자연의 신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눈만 뜨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스위스 사람들의 삶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공기마저 찬란하게 느껴졌다.
시원하게 펼쳐진 호수와 들판, 나무로 만든 집들까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속 예쁜 마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눈 마주치면 친절하게 웃어주던 스위스 사람들도, 툰 호수에 부서지던 햇살까지 여전히 생생하게 마음 속에 남아있다.
여행하는 동안 정말 오랜만에 내일이 기대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평소에는 살아간다기보다 버텨내는 것에 더 가까워서 내일은 어떨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고 설레기란 쉽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에 대한 잡생각이 싹 사라지고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 다시 돌아가면 뭘 해야 하는지 하는 걱정 하나 없이 오로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온통 흑백이던 세상에 물감 하나가 톡 떨어지고 이윽고 수채화 빛으로 물들어 가는 느낌이랄까.
때로는 무지갯빛 같기도 오로라 같기도 했다.
이 기분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이 시간들이 눈물 나도록 그리워지는 날이 오겠지.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이 감정들이 시간이 지나도 그때 그 순간처럼 바래짐 없이 생생하길 바란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마주하더라도 결국 이 기억으로 또 한 번 일어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나의 그 해의 여름이 몇 번의 해를 거듭하고 몇 번의 계절을 반복해도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머물러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