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하게 해 봤던 MBTI 결과 속에서 단 한 번도 변치 않았던 문자는 J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엑셀로 여행 계획을 짜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여행의 목적지는 꼭 정해져 있어야 했다.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조차 ‘계획 없는 여행’이라고 계획한다면 믿을까.
학생 때는 스터디 플래너를 썼고, 지금은 업무일지를 쓴다. 집에서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아까 회사에서 '집에 가면 이거 해야지'는 어째 집에만 가면 하루치 피곤함이 미친 듯이 밀려와서 실패했고,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오늘 다 끝내지 못한 걸 해야지’라며 써놓은 리스트들은, 일찍 맞춰 놓은 알람은커녕 마지막 알람까지 듣지 못해 지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가 세운 계획들을 일렬로 나열하면 과연 지구를 몇 바퀴나 돌 수 있을까? 계획으로 점철된 나날 속에서, 어쩌다 컨디션이 좋았던 날을 제외하고는 나는 대부분의 하루에서 내가 세운 계획을 완벽히 지키지 못했다. 매일매일 작은 실패가 쌓였다. 반복된 실패는 나를 물 먹은 종이처럼 축 처지게 했고, 무력해졌다.
진정한 고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는데, 난 아직도 고수가 되려면 한참 멀었나 보다. 매번 내 능력보다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덕분에 지우지 못한 오늘치 계획들을 보며 자책한다. 유난히도 커다랗게 보이는 체크박스 속 빈칸이 꼭 내 마음 같다. 총알이 가슴을 관통한 듯 뻥 뚫린 가슴 한쪽을 연신 문지른다.
내 이야기를 듣던 상담 선생님이 묻는다. "소현 씨는 왜 그렇게 계획을 세워요?" 곰곰이 생각한다. 목적 없이 부유하고 싶지 않아서. 어디든 정처 없이 떠다니기 싫었다. 여행이든 인생이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싶었다. 적어도 계획을 수행하고 있는 중에는 나의 목적지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니까.
게다가 내게 계획은 미래를 꿈꾸는 데 있어 가장 시각적인 행위였다. 오른손으로 가지런히 써 내려가는 계획은, 쓰기만 해도 다 이루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의 느낌은 유능한 내가 된 듯한 기분을 선사하니까. 일종의 중독이었다. 나는 그 느낌에 자주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날이면 자책하듯 나를 다그쳤고, '그러게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매번 세우는 나'를 향한 지독한 원망이 됐다. 삶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개의 점을 찍는다면 나는 늘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보고 있고, 머릿속으로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내가 되고 싶다'는 갈망으로 갈급했다.
선생님의 물음에 긴 대답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말하면서도 나는 상담 때마다 반복되는 이 패턴의 흐름을 참을 수 없었다. 나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다는 한심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일. 익숙해지니까 그게 제일 쉬웠다. 마음속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내가 되면, 그냥 나만 수긍하면 끝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죽어라 미워하는 것보다 에너지 소모도 덜하니, 이래저래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 안에 고인 원망은 아주 질 나쁜 습관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 회기가 늘어갈수록 지금까지 내가 했던 방법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나를 위한 선택이라 굳게 믿어왔던 행동들이, 칼자루를 반대로 쥐고선 현재의 나를 찌르고 있었다는 걸.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시작한 계획이, 나를 몰아세우던 날 선 칼날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상담 내내 자꾸 눈물이 났다. 이 와중에도 그때 그런 행동을 택했던 내가 또 밉기도 했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선생님이 말했다. 그때는 그게 나의 최선이었을 거라고. 그러니 자신의 탓으로 돌렸던 과거의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란다. 하늘에 구름이 좀 꼈다고 해서 그게 하늘이라는 사실은 변하는 건 아니지 않냐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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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회기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떠올라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침엔 좀 흐리더만, 점심이 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이다.
나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평생에 걸쳐 들여온 습관을 단번에 바꾸기란 쉽지 않을 거다. 어쩌면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의식적으로라도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야지.
매일 써오던 투두리스트 가장 위쪽에, 반듯한 글씨로 적어본다. 오늘의 나를 미워하지 말기. 네모난 상자 옆에 적힌 글자가 제법 결연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