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작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비한다면 어떤 역사적 장면 속 어느 한 구석을 차지한 개인들은 한없이 작다. 역사가 할퀴고 지나가는 자리에 놓였을 때 우리는 대체로 불행해진다. 작은 개인에 불과한 우리는 격동하는 역사에 휩쓸린 줄도 모른 채 휩쓸려 떠내려가고 마는 것.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나 이유를 모르는 채 불행을 맞닥뜨렸던 개인의 이야기들이 마침내 발견되었을 때, 역사는 비로소 다시 쓰인다. 그날, 그 장소, 그 시간에 있던 개인들의 수만큼 자꾸만 다시 쓰이면서 역사는 정확해진다.
연극 <짬뽕>을 본다.
이제 1980년 5월의 광주는 특별한 시공간이 되었지만, 그 특별함 이전에 분명한 평범함이 존재했다.
연극 <짬뽕>의 배경이 되는 중국집 ‘춘래원’은 그 시절의 광주를 보통의 장소로 되돌려놓는다. 짜장면 한 그릇에 300원쯤 하던 시절, 탕수육이 아주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던 그날, 그곳. 비극적인 역사가 휩쓸고 지나가기 전 광주는 죽음보다는 삶이 가까웠고, 엄숙함보다는 유머가 만연했을 테다.
춘래원의 주인 신작로(최재섭)는 그러한 삶의 터전을 지키는 개인이다. 배달부 만식(이원장), 동생 지나(이나경), 연인 미란(이화경)과, 단지 사랑하는 식구들과 행복한 미래를 꾸리길 바라며 통장을 들여다보는 그의 삶은 아주 평범하다.
평화롭던 신작로와 춘래원 식구들의 삶은 어느 하루를 계기로 빠르게 망가지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들어온 탕수육 배달 주문에 들떴던 그 하루가 그들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 되었던 것. 만식이 배달 중에 거리에서 마주친 군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짬뽕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 총구를 들이대며 짬뽕을 요구하는 우스꽝스러운 군인들은 시민을 억압했던 섬뜩한 국가 폭력의 희화된 은유처럼 보이는데, 만식은 그들의 요구에 굴하지 않고 몸싸움을 벌인다. 이후 독재 정권의 폭력이 본격화되고, 춘래원 식구들은 만식의 사건이 국가 폭력의 원인이 된 것이라 믿으며 혼란스러워한다.
만식의 사건과 국가의 폭력. 두 사건은 분명한 별개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두 사건 모두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려 했던 국가와, 그 부당함에 맞서 삶의 터전과 가치를 지키려했던 시민의 저항이었던 것. 역사적 격변이 덮쳐오면 개인의 삶은 역사 속으로 삽입된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하고 역사를 역행하려는 정권의 억압 속에서 개인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안전한 곳에 숨어 순응할 것인가, 부당한 요구에 대하여 정당하게 저항할 것인가.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낼 것인가, 살아가기 위해 죽음을 무릅쓸 것인가.
평범한 개인으로서 신작로의 꿈은 피땀 흘려 일궈낸 자신의 가게 춘래원을 지키는 것뿐이다. 춘래원을 지킴으로써 식구들을 함께 지키는 것만이 그의 절실한 목표다.
군인들을 찾아가서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만식이나, 시청에 가서 시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미란을 필사적으로 말리는 신작로는 자신의 인생에 찾아올 봄―평화로운 일상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처럼 찾아온 국가의 억압 속에서 상징되는 봄은 그보다 더 큰 봄이라서, 결코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 봄이라서, 그 봄을 되찾기 위해 광주의 개인들은 목숨을 걸고 맞서기 시작한다.
미란이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분노한 만식과 지나가 시민들과 함께 맞서기 위해 춘래원을 뛰쳐나간다. 그들의 뒤를 따라,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꿈꾸며, 신작로도 총을 쥐고 춘래원을 박차고 나간다. 이제 춘래원은 더 이상 봄을 기다리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봄을 직접 찾아 나서는 시공간이 된다. 춘래원의 식구들은 거대한 역사의 맥락을 보지 못한 채 파편화된 장면 속에서 존재했던, 말하자면 초현실주의적 개인들에서 역사에 뛰어들어 변화를 만들어내는 현실주의적 개인들로 변모한다. 수많은 개인들의 희생을 뒤로 하고 신작로만 살아남은 춘래원에도 다시 봄은 온다. 찬란하지만 매번 슬프고 그리운 봄이.
늦었지만 광주의 진실이 밝혀졌으므로, 비로소 광주에도 다시 봄이 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당연한 듯 만끽하는 봄은 결코 자연스러운 봄이 아니고, 피와 땀과 눈물로 기어코 찾아낸 봄이자 기필코 지켜야할 봄이다. 역사에 휩쓸리면서 때때로 맞서기도 하는 위대한 개인들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그날 광주에서 탄생한 시민들은 역사를 새로 쓰는 데 성공했다. 5.18 민주항쟁은 시민이 된 개인이 만든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