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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마중도 배웅도 없이 네가 내 인생에 등장했다가 멀어졌다. 아예 못 만나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만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너와의 대화 후에 나는 한동안 웃기만 했다. 나는 배가 고팠고, 하루가 고단했기에 나에게 전해준 너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였고 뒤늦게 예상치 못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너무하다.

 

밤잠을 설쳤다. 내 몸과 마음이 어떻든, 새로운 하루가 왔고 바쁘게 무얼 하지 않으면 틈새로 생각이 쌓여가는 걸 막아야 했다. 주어진 오늘을, 이어져가는 삶을 살아야 했다. 모든 연락을 닫고 나의 일에 집중했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이 턱에 닿음을 느꼈다. 변화가 필요했다. 햇빛을 쐬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러 창문을 향한다.

 

봄 햇살이 따사롭다. 지난주에는 비가 오더니 오늘은 제법 하늘도 파랗다. 자리를 옮겨 다시 일하기 시작한다. 햇살이 전하는 온도에 위로받는다. 문득 지난달에 구매한 시집이 떠오른다. 박준 시인의 <마중도 배웅도 없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시집을 꺼내 소리 내어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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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말을 좋아한다. 시인으로 작품에 선택한 단어들도 좋지만, 그를 라디오 DJ로 만나던 시절에 일상에서 선택하던 단어들이 참 소중했다. 그의 모든 작품을 구매했고,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정말 꺼내 읽은 순간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의 글을 읽으면 목소리가 듣고 싶기 때문일까? 밤에 듣던 차분하지만 가끔은 장난기 어리던 그 목소리가 그립다.

 

시를 읽어 나가며 오늘 다 읽을 수도 있겠다 싶다가, 그렇게 읽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늘 이런 식이다. 끝에 익숙하지 않아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서 절제하고 멈춘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함께 하고 싶은 일정을 만드는 것도. 정도를 넘어가지 않게 조절하길 잘한다. 천천히 오래 좋아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원체 느린 사람의 빠르기인가 싶다.

 

다 소진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편안하게 안아주니 오늘은 시집의 절반만 읽기로 홀로 타협한다. 첫 장에서 반가운 시가 등장한다. 박준 시인을 라디오 DJ로 만나는 마지막 주에 들려주었던 시다.

 

 

섬어(譫語)

 

그해 나의 말은

너에게 닿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말은

나와 가장 멀어진 셈입니다.

 

 

분명 낯선데 '섬어(譫語)'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마음을 울리는 시의 제목을 나는 2년 넘도록 잊지 못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더 좋다. 잠시 그 시에 머문다. 오늘따라 박준이 사용한 비음의 자음들이 단정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떤 상태여도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봐주는 것 같다. 고마운 문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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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고난과 역경을 마주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 한 층 성장하여 처음의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그걸 보면 우리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현실의 이야기가 늘 그리 흘러가지 않는다. 성장해도 문제 해결이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기도 하고, 성장할 거라는 예상이 되는 사건조차 높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실 이게 요즘의 내 상태이다. 성장의 디딤돌이 될 사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용기가 부족한지, 영 시원치 않은 모습이다. ‘4년 전에는 정말 멋졌는데, 3년 전과 2년 전도 나쁘지 않았어. 작년에는 거의 넘어져 있었고, 올해는 일어서야 할 텐데.’ 사람들이 모르는 나의 실체다. 부끄러워서 세상에 나갈 때는 꼭꼭 숨기고 향기롭게 장식하고 나선다. 조금만 유심히 보면 결국 민낯을 쉽게 들키고 말 것을 알면서 우선 치장한다.

 

생각보다 나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지금껏 집 밖에서 진짜 모습을 흘리지 않았다. 너에게조차도.

 

나는 너를 만나는 게 늘 긴장됐다. 만나기 전에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기도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고, 갑작스레 만났던 그 하루가 실은 얼마나 많은 기도가 쌓여서 준비되었는지 아마 너는 모를 것이다. 너와 보낸 시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반짝였고 소중했지만, 그동안 나는 늘 불안했다. 다른 사람보다 너에게 내 민낯을 들키는 것은 민망하면서, 동시에 바라는 것이었다.

 

걱정과 달리 너는 나를 그리 유심히 보지 않았다. 다행이다. 목표가 희미하며 싱거운 내가 최근에 세운 ‘나를 더 사랑하기’ 목표를 네가 나를 보지 않는 사이에 이뤄야겠다는 결심에 불을 붙였다. 빨리 그걸 이뤄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 계획에 없던 상황이 되었다. 아직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사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끝에 약한 나에게 너는 하나의 끝을 고했다. 그 말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문득 이런 너의 모습을 배우고 싶어서 너를 오래 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든다. 페퍼톤스의 ‘coma’는 정규 7집 앨범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풀 밴드 소리를 지닌 페퍼톤스에서 흔하지 않은 피아노 반주로 구성된 곡이고, 솔직함을 담담히 내뱉는 가사라 위로가 필요한 날이면 조용히 골방을 찾아 듣는다. 신재평도 미련 없이 짧게 안녕을 고한다.

 

 

아 어떻게 내가 널 널 잊었을까 

어쩌다 널 까맣게 지웠을까 

다시 한번 돌아갈 순 없을까 

이젠 너무 늦었군 안녕

 

coma(2022) - 페퍼톤스


 

해가 지나도 작별을 고하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평생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삶의 숙제인 듯하다. 중요한 건 내가 이것을 어려워한다는 걸 이제 누구보다 잘 안다는 사실이다. 어제 네가 들려준 이야기가 일주일 동안 내 머리를 울릴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는데, 생각보다 그 진동을 견디고 있다는 게 감사하다.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살고 있다.

 

 

한쪽으로 생각을 몰아넣고 전부인 양 살아갈 거야. 기다리지 않을 거야. 마중도 배웅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들 앞에서는 그냥 양손을 펴 보일 거야. 하나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니 눈을 가까이 대고 목숨이니 사랑이니 재물이니 양명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따라 읽을 필요는 없어. 이제 모두 금이 가고야 만 것들이야

 

박준 - 손금 (부분)

 

 

마중도 배웅도 없이 네가 내 인생에 등장했다가 멀어졌다. 내가 받은 충격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욕심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관계의 썰물 시기에 내가 쓸려 가지 않길 바라는 욕심이다. 붙잡으려는 내 힘이, 놓아 버리는 너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시도할 테지. 원치 않은 헤어짐들 가운데 내가 키운 건 인내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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