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더 이상 친구들과 짓궂은 장난을 주고받지 않는 만우절에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를 찾았다. 한참 전부터 인스타그램 계정도 팔로우해놓고 한 번쯤 가봐야지 생각했는데, 마침 성북동에 두 번째 매장을 개점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종로도 아니고 을지로도 아니고 성북동이라니. 성북구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대충 성북구까지는 우리 동네로 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몹시 반가웠다.
성북동에 새로 생긴 매장은 ‘녹기 전에 성북점’이 아니라 ‘녹기 전에 낱점’이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기존에 그 공간을 쓰고 있던 카페인 ‘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낱’도 내가 나중에 가봐야겠다고 마음에 뒀던 곳이었다. 내가 가보고 싶던 가게들의 개업 소식과 폐업 소식을 동시에 듣게 되자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그곳의 이름을 지점명에 남겨둔 ‘녹기 전에’ 덕분에 마음이 뭉글했다.
‘녹기 전에’ 사장님의 게시물을 읽어보니 가게는 이미 3월 1일에 열었다고 했다. 다만 동네 사람들이 찾는 가게로 자리 잡기 위해 한 달간 온라인 홍보를 따로 하지 않고 ‘로컬 오프닝’ 기간을 가졌다고. 여느 가게와도 다른 특색 있는 행보에 흥미가 생겼다. 이건 안 갈 수가 없겠다. 마침 아이스크림 먹기에 딱 좋은 날씨였으므로 친구를 불러 곧장 ‘녹기 전에 낱점’으로 향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가니 매장이 보였다. 커다란 간판 대신 큼지막한 아이스크림 모형과 빨간 벤치가 반기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분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고, 녹기 전에 사장님 ‘녹싸’도 계셨다. 셀럽을 실제로 만난 것 같은 기분에 들뜨면서도 조금 긴장됐다. 나는 유명인을 보면 어쩐지 늘 긴장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장님은 뒤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고, 다른 직원분이 주문을 받았다. 만우절을 기념해 ‘무지개빛 거짓말’이라는 메뉴를 주문할 때 거짓말을 하면 500원을 할인해준다고 했다. 어떤 재치 있는 거짓말을 쳐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외향적인 내 친구가 “어떡해, 나 거짓말 못하는데!”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토마토를 갈고 있던 녹싸님이 곧장 “거짓말 성공하셨습니다!”라고 답해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사장님의 재치와 순발력이 부러웠다.
‘두 가지 맛’이라는 메뉴를 시키면 한 컵에 아이스크림 두 가지 맛과 맛보기 한 스푼을 얹어 주는데, 우리는 두 컵을 시켜서 무지개빛 거짓말과 이천 쌀, 장미 맛, 용과 맛에 (무지개빛 거짓말 말고는 메뉴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맛보기로는 맥주 맛과 팥 맛을 골랐다. 팥 맛과 무지개빛 거짓말이 특히 내 입맛에 맞았고, 맛이 상상이 가지 않아 도전하는 마음으로 주문했던 장미 맛과 맥주 맛도 의외로 친숙한 맛이라 즐겁게 먹었다. 봄볕이 잘 드는 아담한 공간에서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맛보니 안 그래도 좋았던 기분이 한층 들떴다.
매장도 꼭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아이스크림 같았다. 예를 들어, 책상 위 놓인 조그만 탁상달력에는 본인에게 특별한 날을 달력에 표시해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는데, 1년 365일이 모두 기념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퍼블릭 오프닝 첫날이었던 만큼 아직 빈 날이 많았기에 나와 친구 사인펜으로 각자의 생일을 표시했다. 또 아이스크림 쇼케이스 앞 벽에는 “기다리기 지루하다면 아래를 봅시다...”라고 적힌 종이가 눈알 스티커와 함께 붙어 있었는데, 지시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바닥보다도 작은 거울이 보였다. 거울 옆에는 “인간의 얼굴은 기다림 속에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웃음이 피식 나오게 만드는 위트였다. 단지 “나 유쾌한 사람이에요!”라고 뽐내기 위한 농담이 아니라, 주문을 기다리는 손님의 기분까지도 즐겁게 만들고자 하는 세심함이 담긴 위트.
남다른 재치와 세심함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궁금해져 사장님이 쓴 책을 빌렸다. 『좋은 기분』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다른 게 아니라 사장님이 마음이 맞는 동료를 찾기 위해 가게가 추구하는 가치와 접객의 의미에 관해 썼던 가이드에서 출발한 것이다. 요즘 다른 사람을 어떻게 환대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데다, 친구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브랜딩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얻고 싶기도 했고, 심지어 카페 알바를 시작했으므로 여러모로 도움 되는 내용이 많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말을 걸듯 경어체로 쓰인 책에는 환대와 접객,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사장님의 생각이 담겨 있었다. 동료를 뽑기 위해 쓴 접객 가이드였던 만큼 ‘녹기 전에’라는 아이스크림 가게의 직원으로서 어떻게 접객해야 하는지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단순히 직원과 손님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좋은 기분을 전하고 느끼는 방법을 말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접객에 관한 문장을 읽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환대하고 그로써 나 자신이 편안한 상태에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매장에 들어오기 전 가게의 전경을 찍는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브이 같은 제스처를 취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작은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일입니다. 이를 통해 받는 사람도 그리고 주는 사람도 여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접객뿐 아니라 작은 친절을 베풀어서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도 기쁨을 느끼는 것은, 생각할수록 안 할 이유가 없는 합리적인 일이다. 오히려 하지 않는 게 손해 보는 게 아닌가. 뭘 하든 결국 기분 좋게 사는 것이 목적이니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훑어볼 때는 이 문장이 들어왔다. “저는 훌륭한 접객이 예술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대중을 상대로 하는 대중 예술이자 스스로를 향한 개인적인 예술, 즉 명상이기도 합니다.” 마침 그날 내가 보낸 환대가 박대로 돌아와서 마음이 조금 상한 채였는데, 이 문장을 읽으니 위안이 됐다. 좋은 기분을 전달하는 일은 오로지 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평온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상대의 냉대에 나도 냉대로 맞받아친다고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상대가 어떤 태도를 견지하든, 나는 타인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 것이다. 훌륭한 접객이 명상인 것처럼, 훌륭한 환대 역시 스스로를 향한 명상일 테다.
접객 하나하나에도 고민하여 공들이는 것에서부터 드러나다시피, 사장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허투루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 속 여러 문장들이 나로 하여금 유한한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고,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해야 할지 생각하게 했다. 예컨대 “나는 ‘나라는 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의 총합입니다.”, “하루만 살 것도, 영원을 살 것도 아니라면 매일 자기 안에서 움트는 의미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이든 삶이든 올바른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커집니다. 태도는 뿌리와 같고,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땅 위의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와 같은 문장들 덕분에 올바른 태도로 만물을 대하고,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 매일 내 삶을 잘 일궈 나가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외에도 접객 가이드이니만큼 손님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지에 관한 제안과 예시가 풍부하게 담겨 있어서, 접객이 필요한 알바나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읽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임기응변 능력이 부족하거나 손님을 대하는 게 어색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매장을 떠나는 사람에게 ‘안녕히 가세요’ 대신 ‘좋은 하루 되세요.’처럼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말이나 손님의 맥락을 반영한 배웅 인사를 건네라든지, 손님이 불편한 것을 알아채면 필요해 보이는 것을 먼저 건네거나 말하라든지, 무대에 선 배우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라든지. 보통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고 경험해야만 체득할 수 있는 접객 기술을 얻어갈 수 있어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조금 더 편안한 마음과 매끄러운 몸짓으로 손님을 응대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1일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가 『좋은 기분』을 읽고, 4월 말인 지금 그것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이번 4월은 ‘녹기 전에’가 열고 닫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된 김에 확실히 ‘녹기 전에’로 4월을 닫을 수 있도록 마지막 날에 매장에 가서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와야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학과 기준이 단단히 자리 잡힌 사람들을 보면 빛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녹기 전에 사장님의 삶에 대한(그리고 가게에 대한) 철학과 에디터님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보며 또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바쁜 일상 속에서 나에 대한 생각은 많이 잊고, 자꾸만 세상이 정한 기준만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