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소개하기에 앞서, 불교의 '인타라망'이라는 개념을 미리 소개하고 싶다.
천둥과 번개를 다루는 인타라가 사는 궁전에는 그곳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 그물이 있다고 하는데, 각 그물코마다 보주(寶珠)가 붙어서 다시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가 비치고, 그 하나하나의 그림자 속에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고 한다. 즉, 해석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장애가 되는 일이 없음을 비유한다.
내 뜻과는 상관 없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인간 관계들을 보며 사람과 사람, 나아가 어쩌면 모든 것과의 관계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 때가 있다. (지금도 일부 변치 않는 생각이기는 하다.) 그 생각이 하루종일 머릿속을 뒤흔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결국에는 내가 절대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의 우연성과 필연성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페인팅 수업이 아닌 오브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때문에 늘 쓰던 캔버스가 아닌 다른 매체를 고안해야 했기에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결국 선택한 매체는 책이었는데, 단순한 이유로는 당시에도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좀 더 깊은 의미로는 책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결말이 지어진다는 필연성,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까지 이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인타라망], A6 용지에 인쇄한 20p 가량의 책 작업이다.
자전적인 이야기, 그리고 인연과 우연, 필연에 관련된 다양한 글들을 인용하여 책을 만드는 것을 계획하였다. 소설, 시, 일기, 공연예술 등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접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글들을 대략 몇 주의 시간 동안 추려 모았다.
물론 글귀들을 모아두기만 한다면 단순한 책 작업(그것도 주로 다른 이의 글들을 긁어 모아둔)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이 책의 문구를 뜯어 갈 수 있도록 미리 칼로 칼집을 내어 두었다. 누군지 모를 관객이 나의 작업의 일부를 소유함으로써 나, 혹은 작업 그 자체와 인연을 맺는 우연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시기상 맞아떨어지지 않아 전시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함께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 몇몇이 마음에 드는 글귀를 뜯어 가져갔고, 최근에 동기를 만나 아직 그 글귀를 다이어리에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주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나 역시도 이 작업 자체를 잊고 지낸 지 오래였기 때문에 기쁘고도 묘한 기분이었다. 내 작업물이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