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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호동거실(衚衕居室)] 157수(?) 연작, [松穆館燼餘稿], 李彦瑱 이언진 : 골목길 나의 집

오경에 새벽종이 울리자 

골목길에 우르르 사람들 분주하네.

가난한 자는 밥 구하고 천한 자는 벼슬 구하니 

만인의 심정을 앉아서도 다 아노라. 

五更頭晨鍾動 通衢奔走如馳 

貧求食賤求官 萬人情吾坐知


오는 놈은 소요 가는 놈은 말인데 

길에 오줌 싸고 저자에 똥 눈다.

선생[나]는 코로 청정한 기운을 맡으며 

책상 위에 한 가닥 향을 사른다.

來者牛去者馬 溺于塗糞于市 

先生鼻觀淸淨 床頭焚香一穗 


냄새나고 더러울 때는 똥 실은 배 같고 

깜깜하고 어두울 때는 칠통 같지만

한 치 내 마음도 또한 이 같으니 

문 앞 골목길을 나는 미워할 수 없구나.

臭穢時如糞艘 黑暗時爲漆桶 

方寸地亦如是 吾不嫌門前巷


어디서 문신 새기는 사람을 구해 

그 얼굴에 죄명을 써넣을 수 있을까!

“가짜 글과 거짓 학문으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한 자”의 본보기라고.

安所得文墨匠 記罪過人面上 

以爲假文僞學 欺世盜名榜樣 


맹렬하게 이런 생각이 솟구치네 

내 눈을 남에게 줘 버렸다는.

내 눈에 정신이 있다면 이렇게 절규하리 

“내 눈을 찾아서 내 몸에 돌려줘!”

猛可裡想起來 我有眼寄在人 

眼有神必叫寃 尋我眼還我身 


과거의 부처는 내 生前의 나요

미래의 부처는 내 死後의 나일 것이네

하나의 부처가 이제 현존하고 있나니

바로 衕衚의 李氏 姓 가지 자라네.

過去佛我前我 未來佛身後身 

一個佛方現在 是衕衚姓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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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인간의 문제, 자극적 미디어 속 천민자본주의를 떠올리다”

이언진의 시 호동거실은 몇 백 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 있어서 새로웠다. 역시 인간 사회의 문제, 인간의 문제는 시대를 초월하여 본질적인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1연과 2연에 나온 모습은 요즘 미디어에서 넘쳐나는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떠오르게 했다. 또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삶을 보여주며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유발하는 콘텐츠들도 떠올랐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시에서 묘사된, “貧求食賤求官(빈구식천구관) 가난한 자는 밥 구하고 천한 자는 벼슬 구하니”라는 구절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대표되는 소위 ‘성공’을 하고 무한 경쟁 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일반인들도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溺于塗糞于市(요우도분우시) 길에 오줌 싸고 저자에 똥 눈다”라는 말과 연결 짓게 되었다. 시에서는 오줌을 싸고 똥을 싼다며 다소 직설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정말 혼란한 세상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 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위에서 언급한 ‘똥 같은’ 콘텐츠들이 정말 ‘똥’ 같아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계속 소비되기 때문에 생산되는 것이고 공급과 수요가 계속 서로의 이해를 충족시키기에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오락과 학술 사이, 다채로운 콘텐츠와 공연의 필요성”

 

그렇다고 해서 콘텐츠를 생산할 때 철학적이고 교육적인 콘텐츠만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킬링타임’용이나 ‘도파민’을 충전하기 위한 콘텐츠들도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콘텐츠를 공연으로 확대해 보면 정말 다양한 공연 군상들이 있는데, 공연 역시 한가로운 주말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종류의 공연도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학술적으로 깊이 있으며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만드는 공연 또한 필요하다. 공연이 순간적인 해소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찾거나 ‘좋은’ 공연은 무엇일지 자꾸 생각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싶은 욕심은, 내가 희곡을 포함하여 공연 전반을 살펴보고 있는 학생이기에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혼란한 내면에 피우는 향: 방탕함과 도야의 사이에서”

 

당연히 나 역시 인스타 릴스를 보면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때가 많기에 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시인이 “方寸地亦如是(방촌지역여시) 한 치 내 마음도 또한 이 같으니”라며 자신의 마음도 골목길처럼 혼란하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그 솔직함에 매우 공감했다. 인간이기에 24시간 항상 최선만을 다할 수는 없고 진정한 휴식은 무엇인지, 또 자기 도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적 화자가 “床頭焚香一穗(상두분향일수) 책상 위에 한 가닥 향을 사른다.”라고 표현했듯이, 혼란한 가운데서도 향을 피우는 행위처럼 방탕함과 인격도야 사이에서 인생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또 어느 정도가 각자의 균형점인지 찾아가야 봐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위선과 악의 경계, ‘가짜 글과 거짓 학문’을 향한 통렬한 비판”

 

또 이 시가 특히 좋았던 부분은 “方寸地亦如是 吾不嫌門前巷(방촌지역여시 오불혐문전항) 한 치 내 마음도 또한 이 같으니 문 앞 골목길을 나는 미워할 수 없구나.”라며 외부의 혼란한 상황이 시적 화자 자신에게도 있다며 인정했기 때문이다. 만약 시적 화자가 집밖에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식으로 서술을 했다면 오히려 위선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위선적으로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진솔하게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고 인정을 한 것이다. 이는 오히려 ‘악보다 위선이 더 싫다’, 내지는 차라리 ‘위선보다 악이 낫다’까지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악 구도를 만들어서 더러운 바깥세상과 청렴한 나를 구분 짓고 청렴한 내가 하는 행동은 다 선이며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기보다는 내 마음에도 악이 있다, 더러운 부분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以爲假文僞學 欺世盜名榜樣(이위가문위학 기세도명방양) 가짜 글과 거짓 학문으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한 자”들, 즉 위선이고, “安所得文墨匠 記罪過人面上(안소득문묵장 기죄과인면상)” 어디서 문신 새기는 사람을 구해 얼굴에 죄명을 써야 한다고까지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를 통해 진정한 선악의 존재와 구분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니체와 스토아학파, 그리고 내면 수양: 서양 철학과의 접점”

 

서양 철학자 중에서는 니체나 스토아학파를 떠오르게 했는데, 니체는 기존의 도덕과 종교가 행하는 나약한 자들의 자기기만을 무척 싫어했기에 시적 화자가 말한 가짜 글과 거짓 학문을 비판하는 태도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또 니체가 남긴 유명한 말인 ‘아모르 파티(Amor fati)’처럼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자신의 삶까지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부분이 시적 화자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수용하는 모습과도 통한다고 느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환경보다는 내면의 평정과 덕을 추구했는데, 결국 시적 화자가 내면 수양을 하는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결국 니체가 위선을 비판하고 현실을 긍정하며 스토아학파가 외부는 혼란스러울지라도 내면을 성찰하고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모습은 이 시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비추다: 인간 근원에 대한 성찰”

 

이언진의 시가 정말 글자 그대로, 진정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인간 근원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울처럼 볼 수 있고 나아가 이 시를 읽고 있는 현대의 독자에게도 성찰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감명 깊었다.

 

 

“‘내 눈을 남에게 줘 버렸다’: 주체성 상실과 외부 의존”

 

5연을 살펴보면 “我有眼寄在人(아유안기재인) 내 눈을 남에게 줘 버렸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진짜 내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잃어버리고 외부의 흐름이나 여론, 유행에 휘말려서 타인의 시선을 자신의 ‘눈’처럼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것이 내 생각이었는지 구분도 안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내 눈을 남에게 줘 버렸다’라는 말 역시 시적 화자 또한 이렇게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눈을 내맡긴 꼴이라는 자아비판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의 경우에는 SNS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가치관마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 따라서 하거나 사회가 인정하는 것만 정해진 트랙을 따라 뛰는 듯한 모습이 정말 오래된 관습처럼 굳어진 것 같다. 또 슬픈 얘기지만 이렇게 유행에 휘둘리다 보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겠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욕망이 진실로 나의 욕망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더 불행한 것은 세상이 나를 평가하거나 왜곡한 대로 해석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아 자아 비대나 자아 과소 평가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릇된 자기 인식으로 상대방을 완전히 곡해해서 관계를 그르치기도 한다.

 

 

“‘尋我眼還我身’: 온전한 시선의 회복”

 

그래서 시의 다음 구절이 더욱 소중하게 나가오는데 시적 화자는 “尋我眼還我身(심아안환아신) 내 눈을 찾아서 내 몸에 돌려줘!”라는 말은, 세상의 왜곡된 시선이나 잘못된 유행 대신에 온전한 자기 자신, 주체적인 판단력,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시각 등을 갖고 싶은 열망으로 읽혔다. 세상이 혼탁하고 그런 혼탁한 모습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는 모습은 정말 멋지게 보였고 인간적으로도 배우고 싶은 태도였다.

 

 

“여섯째 연의 불교적 색채, 그리고 ‘나’라는 부처”

 

마지막 6연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다소 난해했다. 일견 불교의 윤회 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過去佛我前我 未來佛身後身 一個佛方現在 是衕衚姓李氏(과거불아전아 미래불신후신 일개불방현재 시동호성이씨) 과거의 부처는 내 生前(생전)의 나요 미래의 부처는 내 死後의 나일 것이네 하나의 부처가 이제 현존하고 있나니 바로 衕衚(동호)의 李氏 姓(이씨 성) 가지 자라네.” 이 구절에서는 하나의 부처가 현존하는데 그 부처가 바로 동호의 이씨성을 가진 자=바로 시적화자 자신을 뜻한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서는 어떤 자부심도 느껴진다. 그리고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살아내다니,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자조적인 외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것을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여 자기 존엄이나 깨달음의 주체로서 시적 화자의 무한긍정으로만 해석한다면 오히려 시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기도 하다. 차라리 과거의 나도 전생의 나고, 미래의 나도 죽은 후의 나인 것처럼 타인도 나고 나도 타인이라는 깨달음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마지막 연을 통해 세상은 불완전하고 혼란하지만 나 역시 타인과 같이 평범하고, 한편 거짓된 자들에게 분노하기도 하지만 자신 역시 그런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진실한 눈을 가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으며,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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