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게 되면 가장 먼저 해당 공연의 장르를 찾아본다. 내가 관람하는 공연 예술의 부류는 주로 세 가지로 나뉜다. 연극, 뮤지컬, 창극. 그런데 <적벽>은 조금 달랐다. 판소리를 소재로 하기에 당연히 ‘창극’으로 분류될 줄 알았는데, ‘뮤지컬’에 속해있었다. 공연 소개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뮤지컬이 아니다. ‘판소리’ 뮤지컬이었다. ‘창극이면 창극이고, 뮤지컬이면 뮤지컬일 텐데’ 하는 의문을 가졌으나, <적벽> 공연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적벽>은 소리, 무용, 연기 및 전통과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적벽>만의 고유한 장르 그 자체의 공연이다.
‘고전 서사’라는 탄탄한 대들보
소리와 무용, 연기라는 세 가지의 요소가 조화롭게 엮이기 위해서는 완성도 높은 스토리라인이 필수적이다.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이 삼박자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소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인 ‘적벽대전’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적벽>은 1368년경 발간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500여 년 후 그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불렸던 판소리 '적벽가'를 원전으로 한다. 일명 [삼국지] 중에서도 가장 박진감 넘치는 3세기 한나라 말엽, 위·한·오나라가 부패와 혼란의 정세 속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 부분을 조명한다.
또한 적벽은 전 회차 한국어 및 영어 자막을 제공한다. 기본 시놉시스 내용 외의 원전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경우에도, 혹은 외국인이어도 충분히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세련된 판소리, 감각적 현대 무용의 조화
공연은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무대를 꽉 채우는 소리 및 안무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소리와 소리꾼의 탁월함
자룡이 분을 참고 선미에 우뚝 나서
가는 배 머무르고 오는 배 바라보며
백 보 안에 가 드듯 마듯 장궁철전을 맥여 비정비팔하고 흉허복실하야
대투를 숙이고 홍무빼 거들어 주먹이 터지게 줌통을 꽉 쥐고
삼지에 심을 올려 궁현을 다르르- 귀밑 아씩 정기일발 깍짓손을 뚝 떼니
번개같이 빠른 살이 해상으로 피르르-
서성 탄 배 덜컥 돛대 와지끈 물에 가 풍-
『동남풍』 中 '조자룡 활 쏘는 대목'
<적벽>의 명장면은 단연 ‘동남풍’이다. 그중에서도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은 기존 ‘적벽가’에서도 대표적인 눈대목(판소리 한 바탕 중 사설 전개 및 음악적 표현에서 주요하게 여겨지는 대목) 중 하나다. 특히 ‘다르르, 피르르, 덜컥, 풍’ 등 의성어와 의태어를 활용해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적벽>은 폭발적인 판소리 합창을 통해 판소리 특유의 다양한 음성 상징어 효과를 극대화한다.
<적벽>은 젠더프리 캐스트로 공연이 진행되고, 이 과정에서 매력적인 조합 및 케미가 형성된다. 이와 같은 시도는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공연되는 판소리의 특성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소리꾼은 남녀노소 모든 배역 소화가 기본이므로, 삼국지 속 특정 ‘캐릭터’로서의 여성 소리꾼들의 뛰어난 소리 및 연기 면모를 관람할 수 있다. 소리꾼들은 성별을 떠나 한 인물로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무대에 존재한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와 동화된 소리꾼들의 연기를 관찰하는 재미 또한 크다.
몸과 부채의 수려한 움직임
<적벽>은 무용극 ‘적벽무’에서 시작된 창작극인 만큼 움직임이 감각적이며 큰 묘미이다. 특히 극적 긴장감과 박진감 넘치는 말 타는 장면은 다양한 움직임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힌다. 배우들의 군무를 통해 실제 말을 타고 추격하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을 준다.
판소리의 생명과도 같은 물건인 ‘부채’는 <적벽> 속 핵심적인 소품으로 활용된다. 적벽 대전 때는 ‘붉을 적(赤)’을 살려 붉은색 부채를 통해 피바다와 같은 전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무대 장치 및 소품을 최소화 한 <적벽>은 부채와 군무를 탁월하게 배치한다. 작은 부채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무대를 자유롭게 누빈다. 부채는 작품 내에서 날카로운 검과 활이 되기도, 이를 막는 갑옷과 방패가 되기도, 혹은 거친 바다의 파도와 바람이 되기도 한다. 인물마다 부채를 다루는 손짓과 섬세함이 다르다는 점 또한 작품의 관람 포인트이다.
전통예술의 가치를 입증하는 ‘적벽’
<적벽>은 국립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초연인 2017년부터 지금의 2025년까지 여섯 번의 무대를 거쳐 꾸준히 진행되는 공연이다. 오랜 기간 동안 올라오면서 탄탄한 작품성 및 마니아층을 다져온 공연인 만큼, 관객에게 만족스럽고 훌륭한 퀄리티의 공연을 선사한다. 판소리 및 현대 무용에 문외한이었던 관객들도 <적벽>을 본 뒤에는 우리나라 전통 예술만의 매력에 새로이 눈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