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하고도 신비한 기분에 휩싸이곤 하는데, 내가 다른 데도 아니고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공연장에선 현실이 차단된다. 공연장은 대다수 밤을 추구한다. 낮이 있더라도 무대에 한해서다. 밤으로 가득한 공연장에서는 현실이 한발 후퇴한다. 무대가 현실을 밀어낸다. 무대의 반대편엔 공연을 보기 위해 온 관객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관객 중 하나이기에, 그렇게 내 주위는 온통 비현실이 된다. 공연장에서는 현실이 비현실적이다.
이번에 가게 된 <2025 사운드베리 시어터>는 축제의 이상하고도 신비한 그 기분을 충분히 느끼고 돌아볼 수 있었던 축제였다.
나는 축제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사람이 많으면 쉽사리 피곤해지며, 몇몇 장소에선 숨 막힌다는 느낌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에는 공연을 보러 몰려드는 사람들의 과도한 경쟁이 한몫한다. 좋은 자리에서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그들의 팬심과 열정은 존중하지만, 언제나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낀 채 힘들어하는 사람들(혹은 갑자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공연이란 강자들의 독식이 되기 쉽다. 자본주의적 흐름을 따라 암표며, 매크로며, 대행, 대포 카메라가 활개를 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거다.
이번 축제는 내가 경험한 여느 축제들과는 달랐다. 우선 실내였다. 야외에서 진행할 때의 변수들, 공연에 방해, 혹은 위험이 될 요소들이 없으니 보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인 얼마인지 들었을 때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500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감당이 가능한 시간인가 싶어 공지를 자세히 보니, 한 팀이 한 시간씩 맡아서 공연을 진행하며, 한 팀이 끝나면 십 분가량 휴식 시간처럼 무대 전환 시간이 있고, 지정석 없이 자유롭게 이동 가능하며 티켓 부스(공연 내내 운영한다)에서 나눠준 손목밴드만 차면 언제든 들어갔다 나갈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걸 알게 되자 괜스레 긴장했던 마음이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실제로 가보니 공연장은 자유로웠다. 입장 줄이 금방 주는 게 신기했다. 공연장 안에 들어가 보니 스탠딩도 삼면에 자리한 좌석도 널널했고, 자리 이동도 자유로웠다. 그래서인가 갑갑함 없이 3층 자리에 앉아 공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음날 출근 때문에 다섯, 원위, 카더가든 공연만 보고 나왔다.
이 중에 아는 가수는 카더가든 뿐이었다. 그러니 실은 카더가든만 보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가수들이 많은 축제에 가보고 싶었다. 이제 곧 봄이니까, 겨우내 얼어붙었던 몸이 녹으며 근질근질해지는 봄이니까. 또한 나는 가끔 나 자신을 방임한다. 특히나 취향에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가 때로 지겨운 것처럼, 새로운 발견을 위해선 방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처음 나온 ‘다섯’이란 밴드는 그런 나의 기대를 충족했다. 수줍게 등장한 그들은 그들의 순서가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 그 수줍고 어색한 표정으로, 그러나 사운드가 꽉 찬 무대를 보여주었다. 노래가 보컬과 악기 연주 중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균형감 있게 전개되어 좋았다. 나는 그들이 부른 곡들의 제목을 적다가 그들이 ‘몽환적인 부르짖음’이라 적었다. 사운드가 몽환적인데도 그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부르짖음은 그들이 부른 가사 속에 있듯이 ‘나’와 ‘너’를 향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너와 나. 다섯의 ‘바다처럼’, ‘youth’ 같은 노래는 우리를 하나로 모여들게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렉기타 소리를 좋아한다. 빙하 사이를 흐르는 푸른 물, 혹은 혈관을 타고 다니는 피의 전기적 흐름, 여름의 저녁놀 아래 튀는 불티 같은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래는 그런 이미지가 가득한 뜨거운 노래였다.
다음에 등장한 ‘원위’는 아이돌 밴드였다. 아이돌 문화가 이제는 우리나라를 거의 먹여 살리고 있지만, 한때 나는 아이돌한테 열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사미 린’이라는 일본 작가의 <최애, 타오르다>(미디어 창비, 2021)라는 소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p.69)
이 문장으로 그 모든 걸 이해했다. 팬의 사랑은 팬이 아닌 사람들의 사랑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안 것이다. 그리고 이날 본 ‘원위’라는 아이돌 밴드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들의 아이돌 모먼트며 진행 실력, 노래 실력은 더할 나위 없었다. 아이돌에게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게 가창력일 텐데, 원위에겐 전혀 지적될 수 없었다. 그들이 ‘야행성’이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지나가다가 들으며 좋다고 생각했던 노래가 그들의 노래였다는 걸 안 순간. 잘 알지 못하던 걸 너무나 잘 알게 된 그 순간. 나의 행복과 팬들의 응원이 뒤섞여 축제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카더가든은 축제의 낭만을 무르익게 했다. 거친 듯 부드러운 그의 음색과 노래의 따뜻한 정감이 어우러져 저녁이 되어가는 이 시간을 무르익게 했다. 자주 그의 노래를 들었었지만, 현장에서 들으니 역시 달랐다. 노래가 들리기에 앞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이 가진 목소리와, 현장에 대동한 드럼과 베이스, 기타가 눈앞에서 어우러져 하나의 곡으로 흘러갔다. 노래는 귀뿐만 아니라 온몸에 육박했다.
내가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노래가 나를 듣고 감상하는 것만 같았다. 노래의 분위기가 달라질 때마다 나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노래가 하이라이트로 향하면 나도 하이트라이트가 되었다. 그만큼 노래의 위력이 평소보다 강해서, 자주 듣던 노래임에도 가사와 분위기를 색다르게 곱씹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오로지 나였다. 숙제처럼 다가올 나날들,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 막연함은 공연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나였다. 축제는 나를 나로 만드는 비현실의 공간이자 순간이었다.
최근에 읽은 한병철의 책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축제에서는 다른 시간이 지배한다. 흘러 지나가는 덧없는 순간들의 순차성으로서의 시간이 제거된다. 그것을 향해 걸어가야 할 목표가 없다. 어떤 것을 향해 걸어갈 때, 시간은 흘러 지나간다. 축제를 걷는 것은 흘러 지나감을 제거한다. 축제에는, 이 성대한 고양된 시간에는 어떤 불멸성이 내재한다.’(p.103)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순간 느꼈던 것은 내 속에서 불멸, 불변하는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곧 봄이다. 봄을 따라 찾아오는 축제들로 겨우내 굳어간 몸과 마음을 풀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