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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내게는 조금 특이한 '자격증'이 있다.


바로 '영화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이다.


물론 이 민간 자격증은 전문 심리상담과는 거리가 멀다. 취업에 도움이 된다던가, 경쟁률이 치열한 자격증도 아니다. 그저 '플라스틱 카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이맘때 나는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이를 취득했다.

 

내 일을 정의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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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을 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함을 차치하고서라도, 일은 나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내가 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 일이 나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의 현 직장은 심리상담센터의 콘텐츠 마케터이다. 하지만 나는 심리학 전공자도, 상담학 전공자도 아니다. 그래서 비전공자가 상담 관련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에 늘 신경이 쓰였다. 내가 맞는 정보를 쓰고 있는 걸까? 어디서 그냥 주워들은 걸 나도 모르게 쓰고 있는 것 아닐까? 불확실할 때가 많았다. 글을 발행하기 전 이것저것 찾아보고, 발행 전 셀프피드백을 몇 차례 해봐도 여전했다. 특히 나의 글을 인쇄해서 오신 분을 만난 이후로는 걱정이 늘었다.


다만 이 과정이 피곤하지는 않다. 비록 전공자는 아니나, 심리학과 상담학은 내가 항상 관심 있어했던 분야였으니까. 대학교 때 칼 로저스의 <진정한 사람 되기>를 읽는 독서모임에 들어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는 이미 지금 유행하는 MBTI 뿐만 아니라 에니어그램, TCI 등 온갖 심리검사를 찾아서 해봤다. 나는 영문학 주전공에 사회학 복수전공을 했지만, 지금 대학시절로 돌아간다면 사회학 대신 심리학을 택할 것 같다. 사회보다 한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더 빠르고, 그렇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심리학을 좋아한다고 해도, 의학정보 읽는다고 다 의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어딘가 마음이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나의 역할은 냉정히 말하자면 상담사가 아니라 상품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기왕 이렇게 찜찜해할 거면 관련 공부를 따로 하자고 마음먹었고, 그 첫 번째 단계가 '영화 치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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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화 치료를 접하게 된 건 유튜브를 통해서다. 미국의 Clinical Director 조나단 데커와 Movie Director 앨런 시라이트가 진행하는 'Cinema Therapy' 채널. 한 편의 영화를 선정해서 상담사인 조나단은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심리를 분석해 주고 상담사의 입장에서 이 사람이 상담에 찾아온다면 어떨지 얘기해 준다. 영화감독인 앨런은 해당 영화의 연출, 연기, 촬영법이 어떻게 그 심리를 표현하는지 설명해 준다. 영화나 심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채널이다.


그리고 이 채널의 영상들을 정주행 하며, 지금까지 나는 '오락적 영화 보기'보다 치유적 영화 보기'를 해오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오락적 관점에서는 줄거리, 액션, 흥미, 배우를 위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치료적 관점에서는 인물, 관계, 통찰, 과정, 자기 자신 위주로 감상하게 된다.


아마 수많은 영화 팬들이 치유적 영화 보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다큐멘터리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오웬이 그랬다. 오웬은 디즈니 영화를 통해 타인과 교감하는 법을 배운다. 오웬은 과장된 액션으로 가득 차 있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그는 디즈니 속 캐릭터들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기쁨을 느낄 때와 슬픔을 느낄 때를 알아차리고, 그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수없이 성찰하며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나도 오웬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 영화를 보고 있던 내 옆에 앉아서 아버지가 물어보셨다고 했다. "저 사람은 왜 울고 있는 거야?" 그러자 내가 아주 진지하게, "슬퍼서 우는 거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귀엽게 느껴지는 일화지만 그때의 나는 치유적 영화 보기를 하고 있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배운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는 캐릭터를 볼 때,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을 볼 때, 그를 따라가며 우리는 치유와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감정의 정화,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영화치료가 적합하지는 않다. 영화를 좋아해야 하고, 무엇보다 영화 속 상황에 '과몰입'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적합하다.


아무튼, 영화 치료라는 걸 알게 된 후 '영화심리상담사'를 구글에 바로 검색했다. 처음 뜨는 인터넷 강좌를 클릭했다. 수강비가 무료였고 (아, 이건 복선이었다) 50% 이상 수강한 뒤 인터넷으로 시험을 쳤다.


결과는 바로 합격. 근데... 자격증 발급이 9만 원이라는 것이다. 수강료도, 시험 치는 것도 무료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영화심리상담사 자격이 여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찾아보니 총 13개의 사설 기관에서 영화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발급하고 있었다. 영화상담사, 영화심리치료상담사 등등 약간 다른 이름으로 조금씩 수정해서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정체가 알고 싶어서, '그알' 취재진처럼 모든 기관에 전화도 한 번씩 해봤는데 받는 곳이 없었다.


이 인터넷 강좌들에서 운영하고 있는 다른 자격증들도 마찬가지다. 타로심리상담사, 문학심리상담사...


당연히 전문 심리상담과는 상관이 없다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다만 가벼워도 이렇게나 가벼운 자격증이었을 줄은 몰랐어서 허무했다. 그냥 플라스틱 카드 발급으로 사업하는 곳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격증 발급을 신청한 이유가 있다. 9만 원을 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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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쨌든 영화치료에 대한, 상담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한 역할을 해주었다. 알게 된 것도 많다. 출퇴근하면서 강좌를 들었을 정도로 나름 최선을 다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내가 무엇과 '동일시'하고 있고, 반대로 무엇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있는지, 자주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다.


*동일시 : 다른 사람의 특징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감소시키는 방어기제

*투사 : 자신의 무의식적이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이 타인에게로 향하는 방어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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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적인 성장과 만족감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이다. 작년에 이 자격증은 오랜만에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진짜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실상 돈만 지불하면 딸 수 있는 자격증이었지만 어쨌든 시험도 만점을 받았다.


이 소소한 성공을 시작으로 작년에 많은 것을 시도했다.


미루고 미루던 토익도 오랜만에 업데이트했고, 부재하던 표준업무절차를 스스로 만들어 새로 회사에 들어오신 분께 공유할 수 있었고, 꾸준히 운동을 하며 제2외국어를 공부했고, 마케팅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던 사이에 그간 시도했던 마케팅이 총합하여 효과를 나타냈다.


자기만족을 위한 성취는 꽤 큰 자기 효능감을 불러왔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이 작은 성취를 통해 다른 쓸모들을 찾아가며, 실로 오랜만에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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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고 성취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다


주변에 이런 자격증을 땄다고 말하자, “아무리 그래도 너니까 쉽게 딴 거 아니야?”라는 반응이 많았다.


이 얘기를 많이 듣고 나니, 이 소소한 자격증을 통해, 조금은 내 덕질을 특별하게 보게 되었다. 영화를 1000편 넘게 봤고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영화들은 적어도 스무 번씩 보는 나. 일반인 중에서는 그래도 영화를 꽤나 많이 본 축에 속한다.


대학 시절 영화 관련 교양 수업을 들으면 정말 쉽게 A+를 받았고 전공 과제도 영화를 인용해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가 많았다. 여러 영화를 본 덕분에 나와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도 문화적 접점을 잘 찾는다. 생각보다 내가 영화를 삶에 정말 많이 활용해 왔고, 나 또한 삶에 더 쓰고 싶어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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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일한 지 3년 차이다. 주니어 레벨에서는 자신의 일의 태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이 비싼 플라스틱 카드를 아직도 소중히 보관한다. 뭐든 열심히 해보려 노력했던 작년의 나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물론 나중에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 플라스틱 카드는 어찌 됐던, 내게는 내 일을 탐구하도록 도와준 '자격증'의 역할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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