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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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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을 알 수 없는 생각들에 짓눌릴 때 습관처럼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날카롭게 얼굴을 치는 바닷바람이 곳곳에 묻은 고뇌의 찌꺼기를 말끔히 털어내 주고, 사각사각 밟히는 모래는 잡념의 메아리로부터 나의 귀를 잠시 해방시킨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밑에서 태닝을 즐기거나, 아이처럼 풍덩 빠져들어 헤엄칠 수도 없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또 한 번 바다를 찾았다. 같이 간 친구에게는 겨울 바다가 가장 예쁘니 꼭 가야겠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 큰 이유가 존재했다.

 

사람들로 꽉 찬 거리에 지쳤고, 평가와 비교의 일상에 지쳤고, 자꾸만 나를 사랑하는 것을 잊는 나에게 지쳤었다. 그래서, 내가 낭만화하는 곳으로 막연히 향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던 노래도 듣지 않고, 오로지 파도가 주는 자극만을 느끼며 10월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걸었다. 비만 죽죽 내리는 영국 날씨에 이골이 났던 참이었다.


유독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의 바다가 더 푸르고 시리다. 현실에 대한 일말의 미련과 생각을 무섭게 흡입하다가도, 작디작은 우리네 마음을 잔잔한 일렁임으로 다독이기도 하는 양면성이 매혹적이다. 부러 겉옷 벗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두 쌍의 사람들이 수평적인 구조로 담겼다.

 

무심코 찍었던 한 장의 사진에서 수많은 서사가 느껴졌다. 바다 앞의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시시하게 웃었을까? 아니면 부디 파도 소리에 묻히길 바라며, 입 밖으로 내어보지 못했던 말을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 내뱉어 보았을까?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는 사람들, 말없이 말을 전하며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홀로 바다와 모래의 경계를 따라 걷는 사람까지. 나 혼자서 바다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니, 문득 마음에 노란빛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나를 등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기도, 각자가 그 순간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알고 싶기도 하다.

 

그들의 말소리와 불규칙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사진을 꺼내볼 때마다 그날의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그날의 바다는 모두의 기억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어쩌면 나만 그 청색의 향연을 이토록 짙게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자유가 고플 때 바다로 향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심연을 낭만화하는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 줄거리가 너무 훤해 지겨울 정도인 현실을 도피해, 아무 존재의 숨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웃고 우는 일그러진 얼굴들과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지나는 모든 이가 남긴 날숨의 잔여물이 공기에 떠다니다 피부에 달라붙어 끈적일 때가 있다.

 

겨울 바다는 그런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압도하는 힘이 있다. 그 원색의 풍경이, 마음으로 내지른 소리없는 비명까지 기가 막히게 흡수한다. 색이 짙어 심연을 닮은 겨울 바다는 휴양지를 찾은 이들로 알록달록해진 여름 바다와는 다른 위로를 건넨다. 사납게 부서지는 겨울의 파도에는 거친 다독임이 있다.

 

밀물을 끌어안아 어지러운 몸과 정신을 씻어내고, 썰물이 남긴 다양한 모양의 조개껍질과 자갈을 주워 간직하고 싶었던 10월의 바르셀로네타. 반나절도 머무르지 않았는데, 습관처럼 우울에 몸을 내던지고 싶을 때마다 그날을 생각한다. 거센 물살은 굳어진 집착과 불안을 깎고 다듬어 주었고, 바람은 호흡하는 법을 잊었던 나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사진 속 담긴 영원히 알지 못할 이야기들은 귀중한 영양분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을 담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정체된 모든 삶에 그러한 찰나가 존재하기를 바라며, 그저 다음의 바다를 기약하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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