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가니새라는 조류가 있다고 한다. ‘세 얼간이’할 때의 그 얼간이가 맞다.
걷는 모습이 뒤뚱뒤뚱 거려서, 혹은 사람에게 경계심이 거의 없어서 등등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추측이 많았다.
이렇게 이름을 대충 지을 수가 있나 싶기도 한 동시에, 그 이름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나에게 가족이 몇몇 새에 대해 더 알려줬다. 옛날에 멸종했다는 도도새도 바보 새라는 뜻이며, 알바트로스는 일본에서는 바보 새로 불린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꼭 이 새들을 주인공으로 희곡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작한 극작 워크숍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글은 대실패였다.
워크숍 기간동안 완성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쓴 부분도 정말로 실패한 작품이었다. 고민한 양에 비해 완성도가 높지는 않은 희곡이었다.
희곡에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말 많았다. 조류의 안락사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고, 동물의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었고, 인간 중심 사회에서 새를 비롯한 비인간 동물들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러나 내 생각을 희곡에 전부 담아낼 수가 없었다.
희곡은 대화로 이루어지는 문학이다.
희곡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가 할 법한 말들을 상상해, 대화로 엮어내는 일이다. 나는 얼가니새와 같은 비인간 동물들의 말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언어를 쓰지 않는 비인간 동물들의 말을 어떻게 가져와야 할지 어려웠다. 과연 내가 그들의 말을, 고통을 상상해서 글을 써도 괜찮은 것인지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인간인 내가 다른 존재의 고통을 상상한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기만이 아닐지 걱정돼 대사 하나 쓰기도 어려웠다.
원래 글을 정말 빨리 쓰는 편이지만, 이 희곡만큼은 한쪽 완성하는데 꼬박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결국 그 희곡은 완성하지 못한 채로, 워크숍에서의 활동은 끝났다. 그 이후로 희곡은 더 멋진,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난 후에 다시 써보겠다며 방치해두었다.
희곡을 손에서 놓아버린 이후로, 정말 많은 동물이 계속해서 목숨을 잃었다. 축사에 일어난 화재로 수천 명의 돼지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일들은 한두 번에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최근에 특히 축사에 화재가 나는 일이 많았으며, 그만큼 많은 동물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으로 친다면 대재앙과도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냥 지나치고 마는 사람들의 일상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수많은 생명이 부조리한 죽음을 맞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매번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을 이야기에 그나마 담아낼 수 있을까.
그 답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좁고 복잡한 골목길에서 하루 종일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해서 이 길을 걷게 되는 이유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 내 작은 발걸음 하나가 어쩌면 새로운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우리가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낸다면, 조금이라도 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한 명 두 명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주지 않을까.
완전히 다른 존재에게 가는 길이 멀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어려운 여정이라도, 더 많은 발걸음이 모여 조금은 더 나은 미래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