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렌치 수프> 스틸컷. 도댕과 외제니.
<프렌치 수프>는 외제니와 도댕의 관계를 단순히 요리사 - 미식가의 관계로 그리지 않는다. 매일 아침 식탁에는 도댕이 설계하고 외제니가 만든 요리가 올라온다. 그 요리를 진정으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과 열정의 기억이 필요하다. 밥을 먹는 일은 부족한 영양소를 새로 채우는 소생(蘇生)의 일이기도 하다. 외제니와 도댕은 식사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기억과 추억을 마주한다. 그들이 요리를 먹는 일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그들의 기억과 추억을 새로이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 외제니와 도댕은 매 끼니를 거치며 그들의 사랑을 음미하고 재생산한다.
영화에 관하여
도댕 부팡은 벨 에포크 시대의 미식가다. 따로 생업을 이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해 보이는 미식가로,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외제니는 그런 도댕 부팡의 사실혼 관계(결혼이 아니다.)에 있는 연인이자 요리사이다. 도댕이 요리를 구상하면 외제니는 마법 같은 솜씨를 부려 요리를 만든다. 이들은 프랑스 어느 작은 마을에서 요리하며 살아간다. 요리를 제외한 이들의 정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옛날에 만나 오랜 시간 요리를 함께해 왔다는 것,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면서 결혼은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만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이외의 내용들은 은유적으로 드러나거나 생략된다. 인생의 황혼기에 만난 이들의 사랑은 조수 비올레트의 조카 폴린, 유리시아 왕자의 만찬 초대 등의 갖가지 여정을 겪는다. 과정을 거치며 이들 사랑의 편린이 조금씩 드러난다. 기웃거리며 보게 하는 이 영화는 사랑의 끝자락에 선 한 연인을 통해 사랑의 방식과 본질을 향유한다.
이 영화가 외제니와 도댕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올곧다. 음식의 준비부터 식사까지, 모든 과정을 소담하게 조명한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 새벽부터 밭에서 배추를 따고 있는 외제니를 보여준다. 이윽고 주방에서 수확한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담긴다. 30분가량 담기는 이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는 음악도, 큰 대화 소리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맛을 내는 데에 집중하는 외제니의 모습과 그를 보조하는 폴린, 도댕, 비올레트의 모습을 담는다. 이윽고 손님들이 들어온다. 보부즈, 마고트, 라바즈, 그리모는 도댕의 오랜 미식가 친구들이다. 정확하게 계산된 타이밍에 맞춰 외제니는 음식을 완성하고, 조수 비올레트는 서빙한다. 도댕과 친구들, 비올레트와 그의 조카 폴린까지 양껏 먹을 정도로 풍성한 식사가 시작된다. 카메라는 그 모든 과정을 특별한 기교 없이 동등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아메리칸 세프>나 <빅 나이트> 등의 요리 영화처럼 완성된 음식을 확대하고 그 반응을 과장시켜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식사라는 양식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담아낼 뿐이다.
영화의 첫머리에 제시되는 만찬의 이모저모는 20분가량의 사랑 고백이다. 요리하는 사람과 그것을 나르는 사람, 먹는 사람 모두는 식사라는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맛과 향으로 채운다. 그들이 그 대가로 지불한 시간은 그들 공동의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은 곧 그들의 문화와 기억으로 남는다. 식사가 끝나고, 주방에서 식탁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을 점유한 것은 다름 아닌 추억이다. 함께한 즐거운 만찬의 저녁이 추억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사랑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프렌치 수프> 스틸컷. 만찬을 준비하는 아침.
굳이 말로 드러나지 않아도 충분한 사랑, 영화에 그려진 사랑은 겉으로는 절제되어 있지만 속으로는 뜨겁다. 잉걸불 같은 사랑이다. 관객은 이들의 사랑을 보며 우아하고 품격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인상은 영화가 제시하는 외제니와 도댕, 그 밖의 주변 인물들에 관한 정보의 편린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렇게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이윽고 외제니가 병에 걸렸음이 드러난다.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의 근간은 요리이다. 요리사 외제니의 죽음은 곧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의 끝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은 요리라는 언어를 통해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사랑을 음미하고 재생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요리되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다.
도댕과 외제니는 그들 사랑의 끝자락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눈물과 운명에의 분노로 뜨겁게 불타오르기보다, 그들의 문법 안에서 잉걸불을 태우기로 한다.
절제된 화법을 뒤집는 것만으로.
도댕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 외제니는 다시는 보지 못할 뛰어난 요리사이며, 긴 사랑을 매일 새로이 맛보게 해준 요리사였다.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한 것은 사랑과 추억의 요리였다. 요리하는 과정은 추억과 기억을 어루만지는 손길이었으며, 그것을 음미하는 일은 사랑에 확신과 초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댕은 그들의 사랑의 마지막에 작은 디저트를 올리고자 한다. 도댕은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고, 외제니가 이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음식이 만들어지고, 서빙되고, 한 술 퍼지고, 입에 들어가는 과정을 찬찬히 담아낸다.
영화는 요리사와 미식가라는 이들의 관계를 단순히 뒤집는 것만으로 이들 사랑의 문법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랑의 격정을 표현했다. 요리사의 자리에서 미식가의 자리로 가게 된 외제니는 도댕의 음식을 찬찬히 맛본다. 그녀가 느낀 맛은 어떤 것이었을까. 음식에 집중하며 혀를 굴리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도댕에게 닿는다.
도댕과 외제니의 시선이 교차한 순간, 넘칠 듯 차오르는 감정은 더 이상 표현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의 머릿속엔 이미 맛과 향이 가득할 테니.
<프렌치 수프> 스틸컷. 마지막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