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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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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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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드라마에서 할머니가 이런 대사를 한다. “나 요새 텔레비전 드라마 안 본다. 왠 줄 알아? 죄다 젊은것들 사랑 얘기뿐이야. 늙은이들은 노래자랑만 보래. 늙어도 심장은 뛰어. 이 가슴이 처지지 심장이 처지니?”.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에서 대개 주목하는 것은 ‘젊은 사람’이다. 젊음이 지나간 사람들은 젊은이의 주변부 인물로 등장하고, 이들의 삶을 중심 플롯이 되지 않는다. 뮤지컬에서도 거의 비슷하다. 특히나 한국 창작뮤지컬의 주인공은 대개 비범한 인물이었고, 평범한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을 그린 작품은 더더욱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문해 학교에 다니는 네 명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본 작품의 제작사 라이브는 지속해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뮤지컬로 그려내 왔다. 대표적으로 뮤지컬 <광주>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속 뜨거웠던 당대 시민들의 모습을, 뮤지컬 <아몬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를 배경으로 작가 이상, 김유정, 그리고 경성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의 일화를 모티브로 당시 문인들의 사랑과 예술을 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번 작품에서는 작품의 모티프가 된 주체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그들의 작업물(시와 그림)을 극에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회의 모습을 적극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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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라이브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영화를 연출한 김재환 감독이 쓴 에세이 도서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원작은 할머니들의 진솔한 시로 찬사를 받았으며, 뮤지컬은 할머니들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뮤지컬 넘버를 만들었다. 프로그램 북에는 그들의 시가 어떻게 넘버로 탄생했는지는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작품은 “늙으면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사는 팔복리의 영란, 춘심, 인순, 분한 네 명의 할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글을 배우기 위해 문해 학교를 다니면서 생기는 일을 다룬다. 그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팔복리를 찾은 시사 고발 다큐멘터리 전문 PD 석구의 사고관 변화도 보여준다.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문해 학교 선생님 가을의 말에, 네 명의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네 명의 할머니 이야기는 곧 시가 된다. 형제, 남편, 자식 뒷바라지 속에서 항상 인생의 조연으로 희생하던 것이 당연했던 할머니들은 숨겨왔던 욕망 혹은 이루지 못했던 꿈 등을 차례차례 드러낸다. 인순이의 시는 ‘첫사랑’, 춘심의 시는 ‘꿈’, 영란의 시는 ‘글을 몰라 손주에게 책을 읽어주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 분한의 시는 ‘자신의 이름’이 된다. 이들은 아팠던 혹은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공유함으로써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간다. 이 중 분한 할머니의 시가 가장 인상 깊다. ‘분한’이라는 이름은 가부장제 속에서 여자라서 한 많고 분했던 분한의 어머니가 딸 셋을 놓고 분해서 지은 것이다. 분한은 이런 자신의 이름을 평생 부끄럽게 여겨 왔다. 그런데, 70살에 배운 글로 스스로 쓴 자신의 이름이 그 자신을 위로했고, 친구들이 정겹게 불러주는 자신의 이름을 되새기며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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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라이브

 

 

부끄러워서 숨겼던 그들의 이야기가 ‘시’를 통해 덤덤하게 세상에 나온다.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는 첫 경험 속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소풍을 가기 위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인생을, 시를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네 할머니들은 과거 너무나도 입고 싶었던 교복을 입고 전국 시 낭송 대회에 나가게 된다. “15살에 입는 교복을 90이 되어서 입는다”는 그들의 수줍은 표정 속에 행복이 가득하다. 대회가 끝나고 인순, 춘심, 영란, 분한은 인생 첫 소풍을 떠나고, 가장 하고 싶었던 보물찾기를 한다. 수업 마지막 날이지만, 더 이상 원이 없는 그들은 모두 행복한 모습이다. 이들이 소풍을 떠난 시기는 더운 여름이 지나고 세상이 온통 울긋불긋 물든 어느 가을날이다. 힘들었던 태양 아래에서 벗어나 과실을 맺은 네 명의 할머니는 추운 겨울, 어쩌면 죽기 직전 일생일대의 변화를 맞이했다. 그들에게 삶은 더 이상 살아야 하거나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대개 부끄러웠던 과거를 드러내지 않고, 평생 속으로 품고 살아간다. 본 작품은 할머니들의 이런 용기, 그리고 서로를 응원하는 그들의 모습과 가을, 석구를 보여주며, 석구와 가을의 이야기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가을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할머니들을 보며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긴다”고 말하고, 시사 고발 다큐멘터리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석구는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충분히 의미 있음을 깨달으며 “행복하려면 체면을 던져야”라고 말한다. 극은 누구나 아팠던 기억 혹은 고이 접어놓았던 소중한 꿈을 다시 한번 꺼내서 직시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정리한다면, 너무나도 찬란하게 극복하고 이를 수 있다는 따뜻한 말을 관객에게 건네기 시작한다.


극은 할머니들의 슬픈 과거나 한글을 몰라서 서러웠던 순간 등을 무겁게 그려내지 않고, 재미있고 재치 있게 표현한다. 키보드, 일렉기타, 어쿠스틱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된 넘버의 다양한 멜로디는 극이 재미를 더한다. 남편 때문에 죽겠다는 할머니들의 심정을 담은 넘버 <화상>은 한 편의 뮤직뱅크를 보는 듯하고, 가수를 꿈꾸는 춘심이 부르는 넘버 <내 꿈은 가수>는 트로트 멜로디를 인용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는 할머니들은 “몸 아플 때는 죽었으면 죽겠고, 재밌을 때는 더 살고 싶다”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데,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할머니들은 그 죽음에 다가와 있지만, 여전히 찬란하고 생동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기타의 선율과 드럼의 비트가 강조되는 음악 속에서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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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공연 현장

 

 

2월 12일, ‘가시나들 소풍날’에 본 공연을 관람했다. 이 날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미뤄온 엄마와 할머니에게 소풍 같은 하루를 선물하는 취지로 기획된 스페셜 데이로, 엄마나 할머니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관객에게는 1+1 할인이 제공됐다. 티켓 창구에서는 관객에게 응원봉을 나누어주었고, 다양한 연령이 객석에 자리한 만큼, 공연 전 안내 사항이 자세히 송출되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제작사에서 준비한 이벤트로 다른 공연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고, 객석과 관객이 하나가 되었다. 넘버 <내 꿈은 가수>가 시작되자, 본 작품의 실제 모델 중 한 분이신 안윤선 할머니와 함께 자리하신 가족 분께서 할머니를 따스하게 안아주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선생님의 모티프가 된 선생님도 바로 옆에 앉아 공연 관람을 하셨는데 서로를 아끼는 세 분의 모습에 눈을 떼기 힘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이들의 소감을 들어볼 시간이 주어졌는데, 이 이야기가 단순히 무대 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로의 확장 가능성과 무대와 사회 간 상호소통성이 강하게 느껴져 감동이 배가 되었다. 그리고 이벤트의 일환으로 관객 중 한 명을 뽑아 딸이 엄마에게 전하는 영상 편지가 송출되었고, 이후 깜짝이벤트로 배우들의 엄마가 배우들에게 전하는 영상 메시지가 공개되어 무대 위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관객과 배우가 함께 넘버를 부르는 싱어롱이벤트가 진행되면서 관객들은 응원봉을 켜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네 명의 할머니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모티프가 된 할머니들에게, 그리고 관객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사랑을 전했다.

 

뮤지컬의 주 관객층은 2030으로, 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매 순간 나이 들어가고,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네 명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가 녹아 있음과 동시에, 평소 관심 두지 않았던 할머니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준다. 특출난 능력을 갖추고 대단한 목표를 향해서 가는 이야기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이 석구의 사고관 변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거나 너무나 익숙하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소중한 이야기를 조망하고,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 또한 충분히 심금을 울릴 수 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문해 학교를 직접 방문하고,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할머니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체험함으로써 당사자성을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뮤지컬 창작의 시작은 흑인과 게이와 같은 당대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뮤지컬은 반드시 대단하지 않아도,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장르다. 한국 창작뮤지컬이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처럼 사회 주변부에 있는 인물들의 삶을 더욱더 조망하고, 우리의 일상이 더 많이 무대 위에 그려지길 바란다. 어쩌면 공감이 사라지고, 서로를 배척하고 혐오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한 현 사회에서 대립과 갈등을 조금이나마 완화해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능해질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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