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때로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누군가 뒤에서 밀고 나가는 것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이것은 추상적인 시간의 감각이다. 시간에 맞춰, 평균적인 기준에 맞춰 사람은 변화해야만 시간이 흘러갔음을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 같다고 느낄 때가 자주 찾아온다. 무한하게 나 자신을 변화시켜 발전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은 신경과 긴장을 팽팽하게 만들어 집 앞의 거리도 가느다란 낱개의 실 위를 걷는 것처럼 만들었다.
유난히 전쟁 같았던 작년이 지났음에도, 시간은 분명히 2025년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나는 몇몇 보내주지 못한 해들이 있다. 시간이 정리할 틈을 주지 못한 채 앞서나가 버린 것인지, 시간을 보내고 난 감각 후에 정리할 결심을 하게 되는지, 전후 상관없이 그것들은 이미 실제에서 손쓸 도리가 없다. 지나치고 지나쳐갔다. 그것에 감사하면서도 가슴안 쪽이 뚫린 듯하고 뇌 한쪽의 기억이 유실된 듯한 궁금증과 고통이 엄습한다.
‘상실’,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전체적인 감각은 상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갖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20살에도 비슷한 물음을 던졌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고등학교,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다니던 친구들, 집에 돌아오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족, 무한한 상상의 자유 그리고 순수함을 허용하는 사회의 암묵적인 분위기. 마음껏 두려워하고 그만큼 즐거워할 수 있는 둔탁하지 않은 예민한 감정들을 품에 안고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을 세월의 흐름과 등가 교환했다.
그 때문에 과거의 나를 보내주지 않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사회로부터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바깥과의 시차를 교란했다. 아직도 그 시간의 나와 기억을 보내줄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시절의 틈바구니를 훑으며 이런 미로를 탈출할 준비를 조금씩 쌓아나가며,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립되었던 시간에 이 문장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이토록 지리멸렬한 내일의 나를 생존시킬 이유를 찾았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작고하신 박완서 작가님이 남기신 유명한 문장이다. 방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나를, 이미 연약해진 나 자신에게 아프게 쏘아붙이는 대신 그 약함을 인정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이 사회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꼭꼭 숨겨 위태로운 길 한복판에 어지럽게 흩뿌려 놓았다. 자신의 약함을 잊어버렸고 어지러운 사회에서 제 물건을 잃어버렸다. 두려움이 많은 나는 재촉하는 눈초리에 못 이겨 눈에 보이는 족족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갔다. 그것이 내가 상실을 잃은 것에서 상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곧 상실된 시간으로 빈 곳에 있던 소중한 것의 자리다. 그러나 나는 이 에세이가 단순 인류애를 담은 극복의 자서전처럼 전하고 싶지는 않다. 상실에 극복하는 인간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극복한 상실이 다른 형태로 다가올 수 있다. 그냥 살아왔던 시간의 중요성은 그저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일 테다. 변화하지 않는 자신을 변화가 불변하는 시간 앞에서 인내함이 시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실처럼 얇은 것들을 엮어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