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취를 시작했다. 집들이만 한 달째. 집들이에 왔던 친구 중 한 명이 축하한다며 꽃 한 다발을 사 와 내게 건넸다. 뭐 이런 걸 준비했냐고 웃어넘겼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꽃을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해졌다.
꽃은 언젠가 시들고, 시들면 버려야 한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내가, 그것도 직접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니. 친구 앞에서 지은 미소 끝에서 깊은 수심도 함께 피어오른다. 집에 마땅한 꽃병도 없어 빈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 물을 붓고 꽃을 넣어두었다. 이걸 어쩌면 좋으려나.
꽃뿐만 아니다.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 끝을 먼저 생각한다. 계약직으로 일했던 전 직장에서는 어땠나. 계약이 끝난 뒤에는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속마음까지는 드러내 보이지 말자며 나 자신을 수시로 단속했다. 가장 기뻐해야 하는 순간에도, 오지 않은 끝을 생각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감정이 모두 사라진 뒤 초라하게 남겨질 나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행복을 매우 갈급해하는 사람이었다. 행복이라는 단어에 몰두하여 행복하지 않았던 날은 달력에서 애써 지워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내가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주관적인 감정에도 나는 이런저런 (나름의) 객관적 이유를 붙여가며 그 크기를 가늠하고 재단하고 있었다.
얼마나 거창하고 비장하게 행복하려고. 거대한 크기의 행복을 좇느라 내게 행복은 늘 오지 않은 미래였다.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라는 비장한 마음만 먹다가 금세 지치기 일쑤. 그리고 다시 반복. 행복하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던 나의 다이어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얼마 전에는 본가에 다녀왔다. 본가에서 지낸 짧은 주말이 지나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엄마는 내게 몇 시 차를 탈 거냐고 물어보는 와중에도 큰 용기에 여러 반찬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오래 두고 먹으려면 집 가서 바로 소분해야 해. 안 그러면 음식에 침 들어가서 금방 상해."
양손 가득 무거운 짐을 들고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집에 도착해서 침대로 직행했다가 엄마의 신신당부가 떠올라 겨우 몸을 일으킨다. 소고기 볶음밥에 마른반찬류, 젓갈... 얘네들 때문에 가방이 이렇게 무거웠던 거구만. 냉장고에 차곡차곡 반찬통을 쌓으며 이걸 언제 다 먹냐는 기분 좋은 투정도 뱉어본다.
그러고 보니 행복도 이 반찬통과 닮았다. 커다란 그릇에 행복이 가득 차길 기다리다가는 이전에 넣어둔 행복까지 상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엄마 말처럼 행복도 작은 용기에 조금씩 소분해두어야 한다. 행복에는 그릇이 작아도 좋다. 소분하는 그릇이 작을수록 행복은 금방 차오를 테니까.
그제야 나는 행복의 기준을 낮춰본다. 멀게만 느껴지던 행복을 커다란 반찬통에서 옮겨 담듯 하나하나 소분하는 연습을 한다. 결로가 심한 탓에 자취방에서는 아침마다 환기를 시키곤 하는데, 처음엔 귀찮기만 했던 게 이제는 갓생 사는 사람의 아침루틴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이것도 소분한 행복 용기라면 꼭 들어맞는 행복의 순간일 거다.
회사에서는 어떤가. 재밌는 일이 생기면 함께 웃을 수 있는 동료가 있다. 얼마 전에는 나의 말 실수담을 풀어놓았는데, 동료가 깔깔 웃어대서 속으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행복의 한 종류겠지. 그동안 꽉 들어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넘겨버렸던 일상의 순간이 새삼 새로워진다.
오늘도 나는 소분해 놓은 반찬을 꺼내 먹는다. 한동안은 엄마 덕분에 반찬 걱정은 없을 거다. 퇴근하고 뭐 먹을까 고민하지 않는 저녁도 나의 행복한 삶의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식탁 옆 아무렇게 놔둔 페트병에서는 흐릿하지만 은은한 꽃내음이 스민다. 이러고 보니 나, 좀 행복한 사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