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토요일, 퇴근 후 비건 요리를 배우러 안국으로 향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자기소개를 나누고, 채소 써는 법부터 배우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일을 하고 있냐?’는 질문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결국 명중해 버렸다. 돈을 버는 일과 함께 글을 쓴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했다. 전혀 글을 쓰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나 보다. 문화예술 관련 글을 쓰고 싶어 전공을 바꿨다는 말에 선생님은 자신은 한 번도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며, 어떻게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때 나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라며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정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일까?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 비록 주관적일지라도 좋은 것을 전달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누군가의 밝은 얼굴을 보면 그것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 마음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갈 추천할 수 있다는 건 정보, 지식, 취향 등 가진 것이 많고 깊어야 한다는 뜻이며, 그걸 하기 위해선 몰입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많은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취향’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 중 ‘저 사람 좋다…?’ 싶으면 대부분 이것저것 다양한 걸 해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매주 한 편의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쓰고 싶지 않은 순간이 더 많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가뜩이나 취향의 깊이가 얕다는 생각이 점점 생겨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는 중에, 나만 보는 글이 아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적지 않고,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으면 어떤 실수를 하던, 문장이 엉망진창이건 무슨 생각을 갖고 살던 아무 상관 없지만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생기는 순간 더 이상 아무렇게나 쓸 수 없다. 어떤 종류든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 싶으면 방어기제가 발동해 (속된 말로) 밑밥을 잔뜩 깔아놓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쓰는 순간을 끝의 끝까지 미루어 놓는 사람이 나다. 그리고 이번 주도 그런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마감을 앞두고 나만의 의식을 치룬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분리수거까지 마친 후 의자에 앉았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되는데, 메모장 속 깜빡이는 노란색 커서는 좀처럼 오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감이 다가오는데 이대로 어쩌나. 답답한 마음에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의 바다인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아무렇게나 책장을 펼치니 익숙한 고민이 담긴 문단이 나타났다.
단 한 번도 내가 속한 무리에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뒤처진 적은 없는데, 글쓰기와 관련해서 상도 여러 번 받았는데,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시작하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 중략…
내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책, 음악, 영화에 대한 대단한 취향 중 어느 것으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발끝에 비빌 정도도 되지 못했다. 나는 무척 행복했고(내가 알아갈 즐거움이 세상에 많이 있다!)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 들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아직은)
- 82p 발췌
씨네21 기자로 활동 중인 이지혜 기자의 글을 좋아했기에, 그녀는 처음부터 글을 능숙하게 썼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니.
공동 저자들의 이름을 보니 내가 사랑하는 작가와 감독들도 함께했다. 영화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이었다 지금은 작가인 이석원, 씨네21의 이다혜 기자, 아티스트 이랑, 배우이자 출판사 무제의 대표 박정민,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김종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소설가 한은형, 그리고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까지. 이들도 ‘쓰고 싶되,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걸까.
쓰는 마음을 매일 고민하는 9명의 이야기는 가장 쓸 수 없었던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여기에 글을 잘 쓸 방법이라던가, 쓰고 싶지 않은데 잘 쓰게 하는 조언은 없다. 그저 자신의 작업실에서, 책상에서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순간을 아주 솔직하게 담아낸 것이 다다. 아티스트 이랑은 책에서 '쓰기 지옥'이란 단어를 만들어 쓸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쓴다는 행위를 절대 시작하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백세희 작가는 두 페이지를 ‘쓰고 싶지 않다’로 가득 채웠고, 배우 박정민은 쓰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서른두 가지나 꼽았는데 그가 나열한 것을 읽으며 나는 구구절절 공감했다.
태생적으로 출력보다는 입력이 쉬운 사람이다. 먹지보다 백지가 무섭다. 백지를 나의 무엇으로 채워나가는 것에 매우 서툴다. 그 과정에서 과연 거짓말을 하나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진지하지 않기 위해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 우수하기 위해서 빨주노초파남보 오색 찬란하게 백지를 채운다. 사실은 천천히 먹을 갈고, 백지 위에 우아한 난만 쳐도 됐을 것을.
- 125p 발췌
하지만 결국, 그들은 여전히 글을 쓴다. 백지에서 활자를 채워 나가기까지 요동치는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하고 싶은 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나의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결국 쓰고 싶은 마음이있기에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쓰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바라는 끝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고운 감독의 말처럼 지금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글이다. 쓰는 일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계속 나아가려 한다.
쓰는 일은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신축성 있는 마음. 무엇에도 지지 않는 유연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를 돌보고 달랜다. 그렇게 나는 다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쓰는 사람이 될 시간이다.”
- 215p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