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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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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메모리>에 대한

많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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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모리> 시사회에 초청받게 되어, 들뜬 마음으로 퇴근 후 광화문 씨네큐브로 달려갔다.

 

해당 영화관은 평소 자주 산책하곤 하던 정동 근처에 있었다. 평일 저녁 그리고 굉장히 추웠던 1월의 어느 목요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영화티켓을 수령하면서 직원 분들이 주신, 영화 <메모리> 사진으로 포장된 핫팩이 그토록 추운 날씨에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아 설레었다.

 

본 영화에 대한 줄거리 및 시놉시스는 이미 충분히 여러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어 있으므로, 필자는 영화를 감상한 후 생각하게 된 두 가지의 관전 포인트를 가지고 이 영화에 대한 단상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1. 우리네의 삶이란 간혹 아니 종종 우연 속에서 뜻밖의 인과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

 

사실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은 두 주인공(실비아와 사울)의 관계가 진전 및 심화되는 많은 과정들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생략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가 되는 것인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사울과 실비아 각각이 처한 상황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둘은 모두 '기억(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memory)'과 관련된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울은 대부분의 많은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치매 환자이고, 실비아는 과거 12살 때 17살의 '벤'이라는 선배로부터 강간당했고, 그로 인해 그 당시를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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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의 기억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대부분 파악할 수 있는 제3자인 관객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일부는 맞고 또다른 일부는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기도 했다. 실비아가 사울을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마주치고 나서 그녀가 자리를 떴을 때 사울은 그녀를 무심코 따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그 남자가 무서웠고, 그 남자는 그녀가 집에 들어간 뒤에도 그 자리를 서성이다가 결국엔 밤을 새고야 말았다. 다음 날이 되어 약간의 걱정이 서린 실비아가 밖에 나와 쓰러져 있는 사울을 발견하고 그의 동생과 연락이 닿아 그렇게 그 문제는 그녀에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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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두 사람이 함께 공원에서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실비아는 사울에게 당신이 바로 나를 강간한 벤의 동창인 걸 아냐고 묻는다. 그러나 사울은 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난다고는 했지만, 그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비아의 동생에 따르면, 실비아는 그 학교를 다니다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실비아와 사울이 학교를 다닌 시기는 겹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되고 나서 실비아는 사울을 만나 그에게 차분히 사과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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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실비아는 왜 하필 사울에게서 자신을 강간한 이의 동창에 대한 모습을 떠올렸을까? 그건 실비아가 '고등학교 동창회 파티'를 참석했던 것이 일종의 촉발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의 학교 제도에 따르면 몇 살부터 몇 살까지 학교를 다니며 그래서 몇 학년끼리 학교를 다니는 시기가 겹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학교 선배로부터 강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고 선명한 실비아에게는 이 동창회 파티를 참석하는 것 자체가 그 기억의 잔해를 떠올리게 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동창회 참석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자리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동창회에서 무언가 불편해하고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조금 더 잘 이해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사울이 실비아를 쳐다보자마자 그녀는 모종의 불안감과 기시감을 느꼈고(정확한 인과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또한 그로 인해 실비아가 자리를 뜨자마자 사울은 그녀를 (마찬가지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따라가게 된다. 아픈 기억이 있고 또한 그 기억을 떠오르게 할 만한 자리에서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실비아의 입장에서는 쳐다보는 저 사람이 혹시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누군가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고, 더군다나 자신을 따라오는 남성이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지만 동창회에 참석한 사울의 입장에서는 자리를 뜨는 누군가(실비아)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 익숙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생각들이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머릿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아무런 연고도 없던 실비아와 사울은 동창회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결국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 것을 보았을 때, 바로 '우리네의 삶이란 간혹 아니 종종 우연 속에서 뜻밖의 인과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2. '사랑'이 반드시 (우리가 흔히 정의내리는) '사랑'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사랑(?)'으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해서 필자의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가는 과정은 정말 잔잔하고 차분하게 흘러갔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다 보니 사울은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단지 실비아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같이 영화를 보아주는 장면은 정말 '사랑'이라 직접적으로 정의내리지 않아도 이것 또한 사랑의 또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번의 관전 포인트와도 연결되는 지점이지만, 두 사람은 사실 전혀 연고가 없고 이 둘은 지극히 우연스러운 동창회-그리고 일종의 추적(?)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서로에 대해서 서서히 알아가게 되면서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준다.

 

왜냐하면 실비아의 엄마, 그리고 사울의 동생은 각각의 상대와 그 누구보다 가깝고 보듬어 줘야 할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은 실비아를, 그리고 사울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사울의 동생은 자신의 딸 사라를 통해서 형을 돌봐달라고 하고 그에게 도우미(실비아)를 구해서 자신의 형 사울을 살펴보려고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사울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차단하고자 그의 형의 행동을 막고 저지한다는 점에서 실비아의 엄마처럼 그도 사울을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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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추어, 실비아의 딸 애나는 실비아에게 특별한 존재다. 영화 초반에서 실비아와 그녀의 딸 애나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애나는 이제 슬슬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애나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을 막을뿐더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인상 깊었던 또다른 장면이기도 한데) 자신의 집에 돌아왔을 때 잠금 장치를 여러 장치를 통해 잠그는 경계 가득한 태세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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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나는 영화 중반부에 애나의 이모(실비아의 동생) 집에서 실비아가 자신의 엄마(실비아와 엄마)와 다투는 장면 속에서 이모의 입을 통해 밝혀지는 내용을 듣고는 자신의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바로, 자신의 딸 실비아를 자신의 남편이 성추행을 가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인정하지 않는 외할머니의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나서다.

 

이후 애나는 자신의 엄마가 가진 다소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았던 모습들을 묵묵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이 사건으로 힘들어 누워 있는 엄마를 안아서 달래주고, 사울의 동생으로 인해 엄마와 사울이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직접 사울의 집에 찾아가 사울과 자신의 엄마를 만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애나는 실비아에게 있어 실질적으로는 딸이지만 엄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실비아에게 '엄마의 역할'을 해주고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그래서 쉬이 정의 내리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것에 있어서, 실비아는 '사울'과의 관계를 통해서, 또한 그녀의 딸 '애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의 여러 다른 모습들을 경험해가게 된다.

 

영화가 아직 관람 가능하니, 필자가 중심적으로 바라 본 두 가지의 관전 포인트를 가지고 부디 관람해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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