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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최근 인류가 오랫동안 구축해온 상징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작품이 등장했다. 성수동 언더스탠드 에비뉴에서 공연된 <브래키에이션>이 바로 그것이다.


"브레키에이션"이라는 생경한 용어로 시작해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마무리되는 이 공연은 기존의 진화 서사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인간 중심의 진화론적 시각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진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진화라는 주제를 철학적으로 해체하고 그 과정을 신체의 움직임과 시간성으로 표현하려는 도전적인 시도다.


공연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동물과 자연을 하위 범주로 규정하는 기존의 진화 서사에서 과감히 탈피한다. 대신, 모든 생명체가 환경 속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고유한 세계를 구축해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개념적 전환을 넘어, 무대 위에서 실제 몸의 움직임을 통해 구현된다.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는 각 생명체의 독특한 존재 방식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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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키에이션을 통해 펼쳐보는 환경과 생명의 상호작용


 

공연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혁신적인 공간 구성이다. 폐쇄적이면서도 실험적인 공간인 컨테이너 박스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과감히 해체한다. 이러한 설정은 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부각시키면서도, 그 안에서 펼쳐지는 생명체들의 움직임에 관객을 더욱 직접적으로 몰입시키는 효과를 창출한다. 고무 테이프로 감긴 하얀 벽과 바닥이라는 미니멀하고 상징적인 구성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무대 자체를 하나의 실험적 캔버스로 변모시킨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바닥에서 무용수들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삐걱거리는 소리다. 이 고무 테이프의 마찰음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생명체들이 환경과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를 상징한다. 관객들은 이러한 소리를 통해 움직임의 현존성을 생생히 체감할 수 있었고, 이는 생존과 적응을 표현하는 핵심적 요소로 기능했다. 이러한 청각적 요소는 시각적 요소와 결합하여 공연의 몰입도를 한층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이 특별한 공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때로는 짐을 나르듯 움직이는 장면은 단순한 노동의 상징을 초월하여, 동물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공동으로 움직이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표현은 자연 속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변화하며 다양한 생명체의 특성을 표현해낸다.


공연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브래키에이션이라는 동작의 새로운 해석이다. 브래키에이션은 본래 유인원이 나무 사이를 이동할 때 팔을 이용해 가지를 타는 독특한 움직임을 지칭한다. 이 동작은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신속한 이동을 가능케 했으며, 이 과정에서 어깨 관절과 손의 구조가 진화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브래키에이션은 단순한 이동 방식이나 진화의 증거를 넘어,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공연에서 브래키에이션은 인간 진화 초기의 환경 적응을 상징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자연 속 모든 존재의 움직임과 생존의 본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확장된다. 무용수들은 이 동작을 통해 단순히 유인원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다. 이는 진화를 단순한 선형적 발전이 아닌, 환경에 대한 창조적 적응의 과정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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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를 넘어 다시 쓰는 생명의 철학적 해석


 

공연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은 기존 우화의 전복과 메를로 퐁티적 안무의 결합이다. 전통적으로 우화는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의 상태를 비유하거나 투사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 의인화는 예술적으로는 공헌을 해왔지만, 동물 자체의 특성과 가치를 간과하고 인간과 동물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공연은 이러한 기존의 우화적 접근을 과감히 전복시키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예시는 개미에 관한 안무다. 현대사회에서 개미는 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상징해왔다. 쉬지 않고 일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저축하는 이미지가 강하면서도, 자신이 땀 흘려 일한 대가를 더 높은 계급인 여왕개미에게 빼앗기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공연의 초반에서는 이러한 전통적 이미지가 열심히 짐을 나르는 모습으로 신체화된다. 그러나 이내 공연은 이 이미지를 전복한다. 개미의 힘과 집단성에 초점을 맞추어, 무용수들이 서로 몸을 부딪히고 섞으면서 높이 쌓아 올리는 장면을 통해 개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결국 더 큰 탑을 무너뜨리는 장면으로 이어져, 성경 속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시키며 기존 우화의 틀을 완전히 해체한다.


이러한 접근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메를로 퐁티의 '몸 철학'은 인간의 지각과 경험이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공연에서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다. 무용수들은 각 생명체가 가진 고유한 운동성, 예컨대 전갈의 경계하는 듯한 긴장감, 뱀의 유연하고 지속적인 흐름, 기린의 우아하고 느린 템포 등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해 낸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동물의 본능적 반응이 아닌,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주체적 행위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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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혁신적인 공연은 진화를 넘어선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선형적 발전이나 위계적 질서가 아닌,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다. 공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우리는 모두 - 인간이든 동물이든 -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진화론적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태학적 시각을 제시한다.


공연은 독특한 공간 구성, 브래키에이션의 재해석, 그리고 우화의 전복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폐쇄적인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브래키에이션은 단순한 진화의 증거가 아닌, 모든 생명체의 창조적 적응을 상징하는 동작으로 재해석된다. 그리고 기존 우화의 전복은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공연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깊은 철학적, 생태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생명체 간의 상호 연결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생태학적 사고와 맞닿아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 공연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중요한 철학적 담론을 제시하는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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