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포로 감시원을 통해 시대적 흐름을 읽다 -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글 입력 2024.12.1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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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시대다. 적어도 평등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다. 아이를 적게 낳는다는 의미였던 ‘저출산’은 낳을 산(産)이 아닌 날 생(生)을 사용하여 ‘저출생’으로서 아이가 태어남에 초점을 맞추었고, 아이가 타고 다니는 이동 수단인 ‘유모차’는 어머니 모(母)가 아닌 아이 아(兒)를 사용하여 ‘유아차’로서 이동 수단을 끄는 사람이 아닌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이 믿는 사상을 떠나 동덕여대 학우들은 모교를 지키기 위해 나섰고, 대법원은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의미가 바뀌고 있음은 곧, 사람들의 사상 또한 바뀌고 있음을 대변한다. ‘포로 감시원’이라는 복합적인 인물을 통해 다면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작품이 창작되고, 나아가 연극으로 관객들을 맞이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편승한 까닭이라고 감히 지레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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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그러나 지워지지도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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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일본군으로서 포로들을 학대한다. 자신을 ‘조선놈’이라고 칭한 포로를 무차별적으로 학대한다. 이 문장들만 읽은 채로 친일파냐고 물으면, 그것은 오산일 테다. 친일파가 아닌 포로 감시원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다.


1942년, 극의 시대적 배경이다. 1942년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이자 1923년생인 최영우가 스무 살이 되는 해이다. 서울로 상경해 대학에 진학하려던 그는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가정에서는 남자 한 명은 강제로 일본군에 징집되거나 이들을 보조하는 노동에 징용되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최영우의 아버지는 자신이 갈 수 없고 장남은 가정을 돌보아야 하니 차남인 최영우가 가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겠느냐며 설득한다. 이러한 설정은 극이 철저히 시대 정신을 따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장남에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최영우, 1923년생. 그러니까 아버지는 1923년생보다 더 이전 세대의 사람이다. 연극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11세 이상이면 누구든지 관람할 수 있다. 2024년을 살아가는 열한 살들은 2013년생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성 인권 교육’과 동갑이다. 유교적 가부장제에 영향을 받은 아버지에게 차남인 최영우가 간다는 결정은 나름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포로 감시원은 군무원이니 그나마 나을 것이라던 말 한마디가 이를 뒷받침한다.


장남이라서, 차남이라서, 혹은 여자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 선택하는 것. 타의가 아닌 자의적인 선택으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현실이 양성평등을 주장해야 하는 이유이며,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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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포로 감시원 채용에 지원한 최영우는 두 달간 존속 훈련을 받은 뒤 남방으로 배치된다.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 않아 안전하고 월급도 많이 준단다. 모은 월급을 대학 등록금에 사용하겠다는 알찬 목표도 세웠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내용과 달리, 사격과 제식 훈련을 받게 된다. 훈련 강도는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훈련 도중에 실수가 발생하자 군인 정신을 길러야 한다면서 서로의 뺨을 때리고 맞기도 한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지배당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잊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다. 따라서 포로 감시원도 그러한 상황에 피해를 받은 피해자임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일본군으로서 포로들을 학대한 사실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포로들을 가장 많이 학대한 이병춘을 통해 이를 더욱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랬던 이병춘조차 초반에는 노는 것을 좋아하는 철없는 청년으로 묘사될 뿐이다. 그렇기에 작가 이경현에게 할아버지의 육필 원고가 세상에 출판될 이유를 찾던 박지은처럼 관객들이 의문을 품고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에 당하는 조선을 그렸던 기존 서사들과 달리, 포로 감시원과 같은 복합적인 인물을 이용해 그 세대를 깊이 있게 조명한 작품이 무대 위로 올라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해진 가해, 사라진 가해자


 

필자는 이병춘도, 판사도, 아버지도 가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시선에서 따라가다 보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병춘이 극에서 포로들을 가장 많이 학대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서로의 뺨을 때리고 맞는 행위가 없었다면, 포로들이 채우지 못한 할당량으로 인해 포로 감시원이 구타당하는 일이 없었다면 많은 ‘만약’이 뒤엉켜 ‘만일’이라는 답변을 만든다. 그들에게 교수형을 선고한 판사 역시 ‘제네바 협약’에 따른 판결이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각자의 사연을 지닌 캐릭터들은 특정 시대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다른 배경과 사연 속에서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연대’하는 것으로 일컫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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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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