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예술을 사랑한다지만 편식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 명화라고 불리는 그림들을 볼 때면 마음의 울림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저 무엇을 그렸는가 볼 뿐이다. 인스턴트 식품을 빠르게 섭취하는 것처럼 줄줄이 걸린 그림들을 슥 훑고 휙휙 지나간다. 이와 달리 누군가는 거대한 그림 앞에 멈춰 유심히 바라보며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천천히 꼭꼭 씹어 감상하는 그들은 어떤 것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시대 상황이었고,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그림이라는 예술을 깊이 향유하기 위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미술에 대한 나의 진입장벽이었다. 그 벽을 허물고 골고루 즐기고자 치유의 미술관의 도움을 받았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현대 사회인의 내면 문제를 과거 화가들의 삶과 연결해 설명한다. 화가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경제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늘 평온할 것 같다. 무탈한 삶에서 나오는 여유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세상을 관찰하며 느긋이 붓칠하고 있을 화가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삶이 그림을 그릴만큼 평화로웠던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내면의 상태를 직시하며 안정을 찾아 나간 것이다.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에곤 실레의 모습은 자신감 있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는 뒤틀어진 신체와 충혈된 눈을 가진 사람이 빈 배경에 벗은 채로 덩그러니 놓인 외설적인 그림을 그려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안정적인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내면의 아이를 위해 그는 비난에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미술을 하며 점진적으로 성장시켰다. 마침내 가족을 보호해 줄 팔과 다리가 자라났다.
예술가들은 적어도 세상에 관심이 많아야 한다.
폴 세잔은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사과 하나로 그려냈다. 정면, 측면 등 사과의 여러 면을 포착하여 하나의 프레임에 다 담았다. 세잔의 사과성이라는 개념은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하나의 사건을 단일 관점이 아닌 복수의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모조품과 진품의 차이는 화가가 담은 진심과 고뇌의 과정에 있다.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는 창의력은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단순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은 적절한 선의 균형과 거리를 위해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없는 모조품과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가치를 가지는 부분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와는 달리 미술에서는 최종적인 결과보다는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더 의미를 둔다.
치유의 미술관을 통해 나름의 작품 감상법을 배웠다. 인물이 나온다면 그 인물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굳센 의지를 보여주나. 어딘가 슬퍼 보이나.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자화상을 보며 다시금 삶을 향한 의지를 다진다. 공허함과 우울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표정에서는 공감하고, 공감받으며 잠시나마 화가에게 지친 마음을 기대어 본다. 그림 한 점으로 과거에 존재했던 화가의 영혼과 현재 존재하는 나의 영혼이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연결되는 체험을 이제는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마흔을 위한’ 치유의 미술관이다. 불안과 방황의 20대를 지나 40쯤 되면 안정기가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흔에는 불안의 주된 원인이 바뀌어 있을 뿐 세월이 더 흐른다고 사는 게 썩 순탄해지지는 않나 보다. 마흔의 불안정성에 대한 스포일러를 보아하니 아마 특정 시기가 온다고 해서 편안한 삶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때때로 상처받곤 하는 우리 내면에 치유가 필요할 땐 예술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치유의 미술관을 통해 한 발짝 가까워진 셈이다.
최근에는 그래피티를 하는 지인을 따라가 벽에 나름의 그림이자 낙서를 하게 되었다. 스프레이의 양과 강도를 정확히 분사하는 것이 영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나에게 있었다.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여기엔 좋아하는 것을 잔뜩 그려볼까 하는 썩 시원치 않은 대답만 나올 뿐이었다.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며 내가 그림을 못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뭘 그릴지 몰라 온전히 나의 것을 만들 수 없었던 것에 아쉬움을 남겼다.
어떤 취미나 일을 할 때 맞닥뜨리는 큰 질문들은 결국 나로 귀결되어 있다.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며, 어떤 음악을 듣고 싶어 하며, 그리고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또는 어떤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가. 그런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면서 총체적으로 ‘나’가 된다. 그러니까 결국 나를 헤아리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방황과 불안을 줄이기 위해 부지런히 애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의 미술관에 나온 자신의 세계관을 마음껏 표현했던 화가들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들은 숨기지 않았다. 아름다운 면도, 불행한 면도 표현하고 싶으면 그려냈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왕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노예와 광대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그들의 삶도 비추었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가득 담은 것이 곧 그들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캔버스 위에 이상에 거의 가까워 보이는 아름다운 현실만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내면을 포함한 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파악하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시작일 것이다. 앞으로는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닌 무엇을 그리고 싶어 했는가를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