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파리는 어떤 곳인가요 ② 한여름의 파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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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파리를 다녀오고 나서 3년이 흘렀다. 두 번 다시 가지 않겠노라 호언장담했던 것이 무색하게 난 파리를 다시 가게 되었다.
전공연수로 라로셸이라는 프랑스의 도시를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친언니가 파리를 관광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아무래도 파리를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고,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동생이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았나 보다. 그래서 연수가 끝나고 나서 언니와 나는 파리에서 합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신랄하게 파리를 비난했지만 내심 기대를 하긴 했다. 연수를 떠났던 시기가 8월이었기 때문에 여름의 유럽은 한결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렇게 2주간의 짧은 연수를 마치고 난 파리에서 언니를 만났다.
한여름의 파리
가족끼리 단 한 번도 유럽여행을 와본 적이 없어서 언니와 파리에 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언니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들뜨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언니와 내가 공통점이 있다고 하면 여행을 가더라도 주체적으로 어딘가를 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기보다는 여유롭게 발 닿는 곳으로 가는 식으로 일정을 소화하는 편이다. 그래서 관광에 있어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고 전체적으로 느슨한 마음으로 '이게 다 경험이다'하고 생각하면서 돌아다니곤 한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에펠탑, 개선문, 오르세 박물관같이 아주 유명한 장소 몇 군데만 방문하고 나머지는 그냥 차를 한 잔 마시거나 가게 창문 너머로 내부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파리는 여전했다. 북적이고 번잡했다. 이번에는 드디어 에펠탑의 꼭대기를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내겐 그저 다 녹슨 철탑일 뿐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여름의 파리는 생기가 있었다. 비록 관광객들이 불어넣은 생기일지도 모르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파리는 꽤 봐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빛 겨울 풍경을 떠올리면 푸른 나무와 덤불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파리지앵들은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와 담배를 즐기고, 튈르리 정원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나도 저렇게 파리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언니는 참을성이 없었다.
좁은 인도에 마련된 테라스 자리에 앉아서 5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감당하면서 커피를 마실 성정이 못 되었고, 매캐한 담배연기는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정원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뜨거운 햇살과 툭하면 나타나는 비둘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나와 언니는 둘 다 조류공포증이 있다.)
이따금씩 운 나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바토무슈 예약시간에 늦을까 봐 생각 없이 탄 택시는 거스름돈을 자기 마음대로 떼먹은 일이 있었고, 빅토르 위고의 생가를 방문하려고 걸어가는 길에 (자신이 전직 교사였다고 주장하는) 한 프랑스 남성에게 잘 못 걸려 원치 않는 가이드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파리를 즐거운 여행으로 기억했다. 단둘이 파리를 여행하며 맞닥뜨린 좋고 나쁜 일들은 결국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우리에게 즐거운 여행이었다는 기억을 남겨주기 위한 빌드업 같았다. 이 정도면 [최악]에서 [보통] 정도로 바꿔주어도 괜찮겠다.
모처럼 떠난 여행이 망한 여행이라서 우울하다면 내가 팁 하나를 전수해주도록 하겠다. 여행에서 만든 나쁜 기억을 결국엔 좋은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선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세뇌시키는 편이 빠를 거라는 것이다. 이게 망한 영화든, 흥한 영화든 간에 영화의 플롯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프로 배우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 쫄딱 망한 여행도 나중엔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난 아직도 거스름돈을 떼먹은 택시 기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만 이 또한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써먹고 있다.
[송연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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