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조이’는 단 하나의 작품, 오직 한 명의 작가, 오로지 팬만을 위한 국내 최초 웹툰 전문 매거진이다. 작품 정보와 등장인물 소개부터 원작의 명장면 다시 보기까지 웹툰의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담겨있다. 웹툰을 사랑하지만 찰나로 흘러가 버리는 감상이 아쉬운 독자, 좋아하는 웹툰과 작가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 웹툰 분야의 트렌드와 인사이트를 넓히고 싶어 하는 독자 등 다양한 독자에게 웹툰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탄생한 것이다.
특히, 매거진 조이에서만 알 수 있는 메이킹 스토리와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웹툰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히 들여볼 수 있다. 작품을 둘러싼 입체적인 시선이 담긴 전문가 리뷰는 깊고 통찰력 있는 감상을 도와준다. 양질의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바탕으로 하나의 웹툰을 넓고 깊게 감상할 수 있다. 이러한 매거진 조이가 선택한 첫 번째 작품은 바로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깨닫는 작품
개인적으로 <집이 없어>를 아주 좋아한다. <집이 없어>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함께 엮어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를 본 적 있나요’ 글을 기고한 적도 있다. 당시에는 하나뿐인 가족, 엄마를 잃고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해준을 위주로 글을 썼다. 극한의 감정과 외로움의 늪에서 상처를 이겨내려고 애쓰는 해준의 슬픔과 힘듦을 적으며, 해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담았다.
완결이 난 후 <집이 없어>의 인상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주인공인 해준뿐만 아니라 은영, 주완, 마리, 하라, 민주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이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각자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지닌 채 10대를 맞이하고,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그 상처를 건강히 승화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상처를 목격한 사람들에게도 공감과 눈물을 자아내고, 독자 역시 함께 성장하게 만든다.
<집이 없어>에 대해 쓰기 어려운 건, 단순히 아이들의 성장담이 아니라 독자까지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 p110,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주완이 등장인물에 대한 인상이 변화하는 것이 독자들이 경험한 사고의 흐름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다고 말한다. ‘박주완 에피소드’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주완은 절친 하라에게 처음에는 은영의 무례함을 이야기하지만, 이후에는 ‘백은영 의외로 괜찮은 애인 듯’이라며 바뀐 인상을 이야기한다. 김마리 역시 자극적인 특종만을 쫓는 모습만을 보고 ‘근데 김마리는 진짜 양심 없더라’고 말하지만 이후에는 ‘김마리 괜찮은 애인 듯’이라고 정정한다.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은 “알면 사랑하고, 모르면 혐오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딱 그대로였다. 은영의 처지를 알고 나니 도무지 그를 혐오할 수 없었다.
- p200, 신채윤 작가
사실 모든 인간관계가 이렇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바라보면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의 사연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다는 말처럼. 작품 극초반 은영은 캐릭터 자체가 진입장벽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캐릭터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소위 ‘은영맘’이 되어 은영의 안녕과 평화를 빌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한 사람을 이해하고, 결국 그가 속한 사회까지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집이 없어>이고, 그렇기에 <집이 없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고유한 빛깔로 빛나는 작품
<집이 없어>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내밀한 일기장은 살펴볼 수 있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오직 그들의 현재만을 반복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 p147, 이용건 만화평론가
이용건 만화평론가의 이 평론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게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 작품의 엔딩에서 주인공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의 아쉬운 점으로 꼽곤 했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도 있게 끝을 맺는 것과 별개로, 이야기 속에서 그 캐릭터의 앞으로 나아갈 행보를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예상할 수 있고, 그렇게 그 캐릭터는 평생 나와 같을 수도 있는 어떤 세상에서 살아 숨쉬고 있을 거라고 끝을 맺는 게 생생한 캐릭터이자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이 없어>를 모두 읽고 난 뒤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해준, 은영, 주완, 마리, 하라, 민주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집이 없어>가 끝나고 이 부분에 대해 아쉬움이 들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들의 현재를 세밀하고 내밀하게 반복하며 이해했기 때문에, 어린 그들의 미래가 어떤 방향과 색깔로 나아갈지라도 그 방향성까지 이해할 수 있을 마음이 쌓였기 때문이다.
비단 웹툰이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하나의 작품을 읽은 후 이 캐릭터들의 삶을 오롯이 이해했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사랑하고, 그렇기에 그들이 나아갈 어떠할 방향의 미래도 응원할 수 있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집이 없어>는 아주 특별하고 마음 속에서 빛나는 작품이다. 팬심으로 덧붙이자면, 어른이 된 주완의 딸이 은영 삼촌과 결혼하고 싶다는 화목하고 따듯한 컷을 통해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라는 안도가 생긴 것도 좋다.
여타 작품들과 달리 악인을 참교육하지도, 사이다를 날려주지도 않는 전개 방식을 취한 <집이 없어>에 대한 질문에 와난 작가는 오히려 이 문제를 사이다로 해결해버리면 무책임하게 느껴질 것 같다고 답했다. 현시에 있을 법한 아픈 경험을 주로 그린 만화인데, 사이다로 해결해버리면 오히려 기만적일 것 같다는 것이다. 폭력을 다루는 작품에서 이 얼마나 섬세하고 다정한 발자국일까. 어느새 ‘사이다’가 트렌드가 되어버린 웹툰 시장에서, 그렇기에 그 트렌드의 문법을 따르지 않은 <집이 없어>는 고유한 빛깔로 반짝이는 작품이다.
함께 성장하는 작품
성장이란 고난에 대한 극복이나, 아픈 과거와의 화해, 자기개발 같은 선형적인 발전 서사로 환원할 수 없다. (…)
만약 성장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어른이라는 하나의 옳은 답을 향해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오답 가능성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과정이지 않을까.
- p126, 위근우 칼럼니스트
나는 나의 상처는 나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치유의 과정에서 주변 사람이 없다면 절대 해낼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집이 없어>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캐릭터인 하라는 ‘나는 개인의 끈기도 열정도 믿지 않아. 그런 것에 기대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하는 건 결국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고 독백한다. 맞는 말이다. 결국 성장은 혼자서는 할 수 없고, 물리적으로도 극한으로 내몰 뿐이다.
수많은 성장 서사로 소급되는 작품들 속에서, ‘<집이 없어>는 세상의 폭력성 앞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서로 오답을 주고받으며 함께 헤매는 것만이 유일한 성장의 기회라는 것을 역설한다’는 위근우 칼럼니스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좋은 어른이라는 하나의 옳은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오답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 성장이라는 말에 안도감도 느낀다. <집이 없어>를 홀로 향유하며 성장을 느꼈고, ‘매거진 조이’를 통해 이 성장이 풍부해졌다. 좋은 작품과 좋은 기획의 콜라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