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中
I. 폴 칼라니티
칼라니티 부부
1997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그는 이 모든 학문의 교차점에 있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 및 철학 과정을 이수한 뒤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 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혹독한 수련 기간도 벌써 10년이 지났고, 이제 열다섯 달만 더 버티면 지겨운 레지던트 생활과 완전한 이별이었다. 나는 상급자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고, 전국 규모의 권위 있는 상도 받았으며, 여러 일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다. (p.23)
최고의 의사로 손꼽히며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 등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무렵, 그에게 암이 찾아오게 됩니다. 환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 오던 서른 여섯 살의 젊은 의사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나는 CT 정밀검사 결과를 휙휙 넘겼다. 진단은 명확했다. 무수한 종양이 폐를 덮고 있었다. 척추는 변형되었고 간엽 전체가 없어졌다. 암이 넓게 전이되어 있었다...하지만 이번 검사 결과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 (p.19)
의사이자 환자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보인 그는 힘든 투병 생활 중에도 레지던트 과정을 마무리하는 등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약 2년 간의 투병 기간 동안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 떠나기 전에(Begore I Go)'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각각 '뉴욕타임스'와 '스탠퍼드메디슨'에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II.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는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와 힌두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종교적 이유로 인해 양쪽 집안의 축복을 받지 못했기에, 폴 칼라니티 가족은 미국 애리조나의 킹맨이라는 사막 도시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영문학, 인간 생물학 학위 과정을 마쳐가던 폴 칼라니티는 어느날 시에라 캠프의 수습 요리사 활동을 하게 됩니다. 활동을 통해 매일 삶의 활기를 느낀 폴 칼라니티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한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러나 그녀는 까르륵 소리를 내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나한테 웃어주는 것 같은데요" 내가 안내자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워요" 그녀가 대답했다...나는 부모들이 불쌍한 아이를 내팽개치는 상황에 경악했고, 한 아이는 그런 처지인데도 내게 미소를 지어주더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p.60)
폴 칼라니티는 신경외과의로 일을 하면서 환자를 위해 애써오게 됩니다. 특히 그는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환자에 대해 고심하게 됩니다.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 보다 신경외과는 '뇌'와 관련되기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했습니다. '몇달 더 삶을 연명하는 대신 어머니가 말 못한다면? 혹은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배재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한다면?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등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했던 것입니다.
즉,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한다. '계속 인생을 살아갈만큼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p.95)
이처럼 수없는 고민과 함께 환자에게 애정을 가지고 레지던트 과정을 임하던 중 폴 칼라니티는 폐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 당시 아내 루시의 말을 빌리면, '정말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고 하며, 책 속에서도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라고 말할 정도의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를 진찰한 의사, 애마는 그에게 '복직'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통계자료나 그래프 등을 보여주는 대신 애마는 폴 칼라니티가 원하는 삶이나 앞으로의 삶을 물어봅니다.
이에 폴 칼라니티는 바쁜 레지던트 생활로 미루어왔던 자녀 계획과 교수 자리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운동과 재활로 체력을 다지면서 일상으로 되돌아가고자 노력하였고, 아내와는 딸 케이디를 갖게 되었으며 레지던트도 무사히 수료하게 됩니다. 또한, 암 치료센터를 겸비한 대학에서 종신 교수 기회를 제공하는 부교수직 자리까지 제안받게 되었습니다. 폴 칼라니티는 극심한 요통과 기침 등의 통증에도 환자들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수술했으며, 오히려 건강한 다른 의사가 실수한 부분을 보완해주기도 했습니다.
몇몇 교수들은 복직하겠다는 내 생각을 적극적으로 말렸다...하지만, 수술용 드릴을 잡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했다. 도덕적인 의무에는 무게가 있고, 무게를 가진 것은 중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생사가 걸린 막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의무가 나를 다시 수술실로 끌어당겼다. (p.182)
폴 칼라니티의 종양 또한 점차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던 중, 어느날 갑자기 새로운 종양이 우중엽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급속도로 그의 몸은 약해져만 갔습니다. 점차 병원에 입원해야하는 나날들이 많아졌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나날들도 많아지기 되었습니다. 몸의 각부분이 불협화음을 내면서, 한쪽 몸의 부분을 치료하려면 다른쪽 몸의 부분을 희생해야하는 문제가 생겼고, 각 장기 기관의 전문가들이 모여 의견 불일치가 나타났습니다. 의학에서는 이를 WISCOS(Who is the captin of the ship?)라고 불렀고, 폴 칼라니티는 틈만 나면 '숨결이 바람 될 때'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원고 끝부분은 아내 루시가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미완성의 '숨결이 바람 될 때'에 대해 '이 책은 미완성인 상태가 가장 완성된 상태'라고 언급하며 그에 대한 지지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졌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p.234)
- 폴 칼라니티가 딸 케이디에게 전하는 메시지 中
III. 죽음도 삶의 일부
서른 여섯의 의사 폴 칼라니티의 담담한 문체는 '죽음'을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그의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특히 그는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 자신의 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폐암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그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냥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내 목표는 바로 그 정도라고 생각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그는 시한부 폐암 환자였지만 동시에 신경외과 의사로서의 삶, 남편으로서의 삶, 아버지로서의 삶 등을 놓지 않았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 모든 '일상'이 멈춘 채 살아가야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이어나가는 그의 용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삼십 대에 죽는 건 이제 드문 일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라는 그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있습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결과보단 '일상'이라는 과정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